“안녕하세요. 잡학사전에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TV 화면 조정시간은 뭐 하는 시간인가요? 그리고 그때 뜨는 무지개 색 화면은 왜 그렇게 생긴 건가요? 그 조정시간마저 끝나면 나오는 ‘지지직’하는 소리랑 회색 점들이 튀는 그 화면도 궁금합니다.” - 경기 파주시 출신 S 씨
질문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모른다는 것마저 몰랐다”는 걸 알아가는 재미를 추구하는 이 꼭지에 참 잘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게 궁금한 것 같기도 한데 직접 알아보기는 귀찮다’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을 주시거나 페이스북 fb.com/bigkini를 찾아주시면 성심껏 취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TV 화면 조정 시간에는 당연히 TV 화면을 조정했다
TV 화면 조정시간이 존재하는 건 여전히 많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저장을 뜻하는 아이콘으로 플로피디스크 모양을 쓰는 것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예전에는 정말 플로피디스크를 써서 자료를 저장했던 것처럼 옛날에는 정말 TV 화면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진설명)어린이 여러분, 정말입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흔히 ‘디스켓’이라고 부르던 플로피디스크에 컴퓨터 데이터를 담는 일이 흔했습니다. 왼쪽부터 7인치, 5.25인치, 3.5인치 플로피디스크. 그 전에는 컴퓨터에서 자료를 저장할 때 카세트테이프도 썼는데 여러분은 카세트테이프도 뭔지 모르실 테니 패스.
잠깐 1981년 1월 7일자 동아일보에서 소개한 ‘올바른 컬러TV 시청법’ 기사를 보실까요?
“(TV에서) 컬러가 나오지 않고 흑백으로 나올 때가 있는데 이런 때에는 수상기에 고장이 난 경우는 드물고 조정이 안 된 경우가 많다. … 컬러는 빨간색과 초록색 청색 등 세 가지 색깔로 배합돼서 나오는데 이것 역시 안내서나 수상기에 표시된 것을 보고 좌우로 적당히 돌려서 어울리는 색의 배합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비밀이 하나 더 풀립니다. TV 화면이 빨강과 초록, 파랑을 기준으로 색을 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술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은 기억하실 텐데요, 이 세 가지 색깔이 바로 ‘빛의 삼원색’입니다. 이 세 가지 색을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흔히 ‘RGB(Red, Green, Blue) 컬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RGB의 비밀
여기서 원색(原色)은 이 색깔을 비율을 달리해 섞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색깔을 똑같은 비율로 섞으면 아래 그림처럼 나옵니다.
이 색깔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네, 바로 TV 화면 조정 시간에 보던 그 무지개색이 바로 이 일곱 가지 색입니다. 이를 ‘테스트 패턴’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화면 조정 때 나오는 무지개 색하고 이 일곱 가지 색깔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TV 화면 조정 때는 보통 밝기(intensity)를 75%로 내보내기 때문입니다.
색깔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맨 왼쪽부터 번갈아서 가면서 파랑이 한 번은 들어갔다가 한 번은 빠집니다. 빨강은 맨 왼쪽부터 1, 2번에는 들어갔다가 3, 4번에는 빠지고 5, 6번에 들어갔다가 다시 7번에는 빠집니다. 녹색은 왼쪽 4개에는 들어가고 오른쪽 3개에서는 빠집니다.
이렇게 순서를 정한 건 이 세 가지 색 중에 하나만 빠져도 다른 색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빨강과 녹색을 제아무리 섞어도 파랑, 시안, 하양, 마젠타는 만들 수 없습니다. 광원(光源) 단위 면적당 밝기를 나타내는 휘도(輝度·luminance)에 녹색이 끼치는 영향이 제일 크기 때문에 녹색을 제일 먼저 조정하고, 그다음 빨강 마지막으로 파랑을 조정하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줄은 ‘색 조화(color balance)’를 조절하는 구실을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색깔은 모두 파랑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색깔입니다. 만약 TV 수신기가 파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첫 줄과 두 번째 줄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지막 줄은 휘도 범위 조절용입니다. 밝기 대비가 잘 되는지 확인하는 영역인 것. 전문가가 아니면 정확하게 화면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이 줄에 있는 하얀색이 최대한 하얗게 나오도록 조절하라고 조언하는 전문가가 많았습니다.
●그 동그라미는 왜?
그런데 테스트 패턴에는 저렇게 무지개 색으로만 된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래 그림처럼 한가운데 동그라미가 자리 잡고 있는 화면도 있었습니다. 이런 디자인은 그냥 제조사에서 ‘만들기 나름’입니다.
이렇게 도형을 넣으면 화면을 좀더 평면에 가깝게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요? 예전에 우리가 ‘브라운관(음극선관·CRT)’이라고 부르던 TV나 컴퓨터 모니터는 화면이 평면이 아니라 가운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화면에서는 ‘기하학적 왜곡(geometric distortion)’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그림 맨 왼쪽처럼 직선을 표현하고 싶어도 화면 조정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
그러니 화면 가운데 동그라미를 넣고 곳곳에 선을 넣어서 이 왜곡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화면을 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겁니다. 색깔뿐만 아니라 ‘모양’도 조정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 TV 화면 조정 시간이나 그 시간이 끝나면 ‘삐~’하는 소리가 날 때가 있는데 그 소리는 ‘사인파(波)’입니다. 사인(sine)은 수학 시간에 배운 그 삼각함수 맞습니다. 소리 파형이 사인 함수 그래프 모양이라 사인파입니다. 사인파는 가장 단순하고 깔끔한 소리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소리를 조정하라는 뜻에서 사인파를 내보내는 겁니다.
●그 지지직거리는 화면은?
방송 종료 때 TV 화면 조정 시간이 끝나면 보통 아래 그림 같은 화면이 나왔습니다.
흔히 ‘백색 소음(white noise)’이라고 부르는 모습입니다. 주파수 형태가 ‘흰 빛’하고 똑같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빛의 삼원색 모두 섞으면 흰색이 나오는 것처럼 모든 주파수 성분이 잡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이런 형태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 이유는 TV가 아무런 전파를 수신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TV는 원래 채널별로 각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전파만 골라서 수신하도록 돼 있는데, 잡아야 할 전파가 사라졌으니 이런 화면이 보이는 겁니다.
● 그냥 처음에 조정해서 나오면 안 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냥 처음에 TV를 설치할 때나 아니면 아예 TV를 생산할 때 한번에 끝내면 안 되는 걸까요?
여기서 주의하셔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이제는 케이블TV나 인터넷(IP)TV 같은 커넥티드(connected) TV 보급률이 150%를 넘어선 상태. 하지만 원래 TV는 지금 라디오가 그런 것처럼 무선으로 전파를 직접 수신하는 형태였습니다. 집 옥상이나 지붕에 아래 사진 같은 TV 안테나를 설치하는 게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었죠.
당연히 지금처럼 TV가 항상 깨끗하게 나오던 것도 아닙니다. TV가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지붕에 올라간 가족 한 명이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리고, 방에 있는 가족이 ‘잘 나온다’, ‘아니다’고 알려주는 장면도 흔했습니다. 또 앞서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도 “우리나라 방송국의 컬러 시스템이 통일돼 있지 않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방송국 채널을 돌릴 때마다 조정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TV에 연결할 수 있는 전자장비가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TV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기사에 나온 그림을 TV로 보내 화면을 조절하는 것도 가능한 세상이 됐지만 당시에는 방송국에서 이런 화면을 내보내지 않으면 다른 수단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화면 조정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방송국 관점에서 TV 화면 조정 시간은 중앙 방송국에서 각 송신소까지 전파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시험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에 서울에 있는 방송국에서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방송국 송신소와 이를 연결하는 중계소에서 기술 담담자도 조정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제는 24시간 종일방송을 하는 방송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별도로 화면 조정 시간이 없는 일이 흔합니다. 화면 조정 시간이 있는 경우에도 주로 ‘필러(filler)’라고 부르는 (보통 자연 환경을 촬영한) 영상을 내보내는 일이 많기 때문에 ‘테스트 패턴’은 더더욱 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니까 이 데스트 패턴을 알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아재 인증’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같이 아재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설명충’은 저 혼자 되겠습니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kini@donga.com 또는 fb.com/bigkini 저를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도 물론 환영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