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정연석(가명·48) 씨는 올 2월부터 목마름 증세가 심해졌다. 소변 양도 많아졌다. 감기 후유증인가 싶었다. 아니었다. 병원에서 혈당을 측정했더니 공복혈당이 326mg/dL이었다. 공복혈당이 125를 초과하면 당뇨병으로 진단한다. 이미 정 씨는 중증 당뇨병 환자인 셈이다.
사실 정 씨는 당뇨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해 4월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이미 당뇨병 초기라는 데이터가 나왔다. 다만 결과지에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이 적혀 있지 않아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결과지에는 내분비내과 진료를 받아보라는 권유만 담겨 있었다. 정 씨는 “병이 아니라는데 유난 떨고 싶지 않았다. 회사 일도 바쁘고 개인적으로 정신이 없던 때이기도 해서 진료를 받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 씨가 당시의 검진 결과지를 들고 김민선 서울아산병원 당뇨병센터 소장(내분비내과 교수·53)을 만났다. 김 소장은 “결과지를 꼼꼼히 봤다면 당뇨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 당화혈색소는 당료병 진단 으뜸 지표
지난해 4월 건강검진 당시 정 씨의 공복혈당은 113이었다. 공복혈당이 99 이하이면 정상이다. 그러니 정 씨는 당뇨병 전 단계인 공복혈당장애(100∼125)에 해당하지만 당뇨병은 아니다.
식후 2시간 혈당으로도 당뇨병 여부를 알 수 있다. 식후 2시간 혈당은 139 이하일 때 정상이다. 이 혈당이 140∼199이면 당뇨병 전 단계인 내당능장애, 200을 초과하면 당뇨병으로 진단한다. 정 씨는 식후 2시간 혈당을 따로 측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공복혈당이 당뇨병 전 단계이기 때문에 정 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정 씨가 당화혈색소(HbA1c) 수치에 주목했다면 대응은 달라졌을 수 있다.
당화혈색소는 적혈구의 혈색소가 얼마나 ‘당화(糖化)’되었는가를 가리키는 지표다. 당뇨병 환자라면 혈액 안의 포도당 농도가 높아질 것이다. 당연히 당화된 혈색소도 많을 것이고, 당화혈색소 비중도 올라갈 것이다. 의학적으로 당화혈색소가 5.6% 이하이면 정상이다. 당뇨병 전 단계는 5.7∼6.4%이며 6.5%를 넘어서면 당뇨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한다. 당시 정 씨의 당화혈색소는 6.5%였다. 이미 당뇨병에 걸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화혈색소에 주목하지 않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의사도 그 점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김 교수는 “당화혈색소는 최근 2, 3개월의 평균 혈당 상태를 반영하는 지표다. 예전에는 검사 표준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임상 현장에 잘 적용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김 교수는 “당뇨병 초기에는 공복혈당이 잘 안 올라가고 식후혈당만 올라가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대부분 공복혈당만 재니까 초기 당뇨병을 놓치기 쉽다. 당화혈색소 수치로 이런 초기 당뇨병을 찾아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 편한 마음만으로도 치료 효과
정 씨의 2월 검사 기록을 보면 공복혈당은 326, 당화혈색소는 11.3까지 치솟아 있었다. 당장 치료가 시급한 상황. 정 씨는 세 종류의 약을 처방받았다. 갑자기 치솟은 혈당을 떨어뜨리기 위해 의사는 약을 ‘강하게’ 처방했다고 한다. 이후 5개월 동안 집중 치료를 받은 결과 공복혈당은 106으로 떨어졌다. 당화혈색소도 5.5%로 낮아졌다. 놀라운 성적표다.
우선 약을 꾸준히 복용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잘못된 식습관을 고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정 씨는 폭식을 줄이기 위해 안 먹던 아침 식사를 챙기기 시작했다. 매 끼니 식사량은 절반으로 줄였다. 한두 달은 배고픔 때문에 서글펐다. 그 고통을 넘기니 곧 익숙해졌다. 고기의 지방은 제거하고 살코기만 먹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채소를 먹기 위해 쌈을 식탁에 올렸다.
김 교수는 올바른 식습관에 대해 ‘원칙’을 강조했다. 채소는 씹어 먹어야 한다. 과일과 섞어 즙을 내면 당이 농축된다. 그런 즙을 먹으면 혈당을 높일 수 있다. 또 정제되지 않은 곡물을 추천했다. 껍질을 다 벗겨낸 ‘고운 곡물가루’는 좋지 않다. 편식도 금물이다. 가급적 여러 반찬을 조금씩 먹기를 추천한다. 간편식이나 외식은 피해야 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기름진 것을 먹어야 한다. 김 교수는 이를 ‘맛없는 음식 먹기 운동’이라 부른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노력한 점도 치료 효과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정 씨는 사직서를 쓸까 말까 고민했을 정도로 직장 내 스트레스가 컸다. 당뇨병을 치료하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고 애썼다. 마음이 편해지자 스트레스가 줄었고, 혈당이 떨어졌다.
김 교수는 “환자의 50% 정도는 혈당이 확 올라가기 전에 갈증을 느끼면서 음료수나 주스, 과일을 많이 찾는다. 그런데 20% 정도는 정 씨처럼 스트레스 때문에 혈당이 급격하게 올라간다”라고 설명했다.
○ 당뇨 치료는 평생 해야
정 씨는 “조금 더 좋아지면 약을 끊어도 되나”라고 물었다. 김 교수는 “약을 줄이더라도 끊어서는 안 된다. 장기적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또 김 교수는 정기적으로 운동하라는 처방도 내렸다. 정 씨는 당뇨병 진단을 받은 이후 운동 장비를 사놓았지만 거의 써 본 일이 없다. 김 교수는 “약만으로 완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당뇨병이 오래 지속되면 몸 상태는 조금씩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운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질 확률이 있다”고 충고했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집중 상담이 끝났다. 정 씨는 “혈당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솔직히 곧 당뇨병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일했던 것 같다. 당장 운동부터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주범은 단 음식 아닌 비만… 술-지속적 스트레스 치명적▼
당뇨병에 관한 궁금증 ABC
당뇨병은 혈당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병이다.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인 인슐린이 부족하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게 원인. 많아진 혈당은 소변으로 빠져나간다.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니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합병증이 생긴다. 자칫 장기와 신경 손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과장되게 알려진 부분도 있다. 김민선 교수의 도움을 받아 당뇨병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정리해봤다.
1. 단 음식이 주범은 아니다
―단 음식을 많이 먹으면 당뇨에 걸린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단 음식이 당뇨병을 유발하는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다만 간접적 원인은 될 수 있다. 단 음식은 열량이 높아 비만을 유발하며, 이로 인해 인슐린 저항성이 증가하면 당뇨병 발생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단 음식이 아니라 비만이 당뇨병의 주원인이다.
2. 술은 치명적이다
―만성적이며 과도한 음주는 당뇨병뿐 아니라 알코올성 간질환, 고혈압, 비만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미국당뇨병학회는 당뇨병에 걸리면 남자는 200mL 잔으로 맥주 2잔, 여자는 1잔 이내로 제한한다. 만약 간 질환이나 다른 합병증이 있을 경우에는 알코올 섭취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3.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금물이다
―단기간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증가하면서 혈당도 올라갈 수 있다. 다만 이런 현상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당뇨병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지속적인 스트레스다.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당뇨병으로 이어질 수 있고, 당뇨병 환자의 경우에는 혈당을 더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4. 꾸준한 운동은 즉효약이다
―당뇨병을 예방하는 것뿐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체중 조절은 필수다. 비만한 당뇨병 환자가 체중을 줄이면 혈당이 개선된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연구에서 입증됐다. 다만 체중 감량 이후 요요 현상이 나타나면 혈당이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 그러니 당뇨병 환자들은 생활 속에서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5. 무리한 운동은 도움이 안 된다
―대부분의 당뇨병 환자에게 운동은 도움이 되지만 건강 상태를 먼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만약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이 있거나,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다면 무리한 운동은 금물이다. 몸 상태에 따라 운동의 종류와 강도가 달라지니 담당 의사와 꼭 상의해야 한다.
6. 육식을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다
―올바른 식사 요법의 기본 원칙은 제때, 골고루, 알맞게 식사를 하는 것이다. 잡곡밥과 채식 위주로만 식단을 구성하면 단백질 섭취 부족이 생길 수 있다. 육류, 생선, 두부 등을 첨가해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 한다.
7. 정기적인 합병증 검사가 중요하다
―혈액 속에 당이 지나치게 많으면 혈관이 조금씩 좁아지다가 나중엔 아예 막혀버린다. 미세혈관이 가장 파괴되기 쉽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자각 증상이 없을 때가 많다. 따라서 미세혈관이 많은 눈과 발에 치명적인 합병증이 생기기 전에 적극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
▼‘환자 말 속에 치료법’ 소신… 한마디 하소연에도 귀 기울여▼
당뇨병 베스트 닥터
김민선 서울아산병원 당뇨병센터 소장
김민선 서울아산병원 당뇨병센터 소장(내분비내과 교수)은 환자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인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환자의 말에서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김 소장은 연구를 많이 하는 의사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영국 런던대 부속 해머스미스병원에서 식욕조절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스티븐 블룸 교수와 비만 및 당뇨 치료법을 공동으로 연구했다. 김 소장은 블룸 교수와 함께 식욕을 증가시키는 단백질과 관련해 11편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은 내분비 분야의 세계적 학술지인 ‘저널 오브 클리니컬 인베스티게이션(JCI)’ ‘당뇨(Diabetes)’ 등에 실렸다.
김 소장은 2002년부터 서울아산병원에 근무했다. 이 병원 내분비내과 이기업 교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식욕을 조절하는 물질의 작용 기전을 규명했다. 이 연구 결과가 담긴 논문이 ‘네이처 메디신’과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발표됐다.
최근 김 소장은 뇌의 이상으로 인해 당뇨병이 발생하는 기전을 밝혀내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연구를 주로 한다. 2013년에는 뇌 시상하부에 존재하는 ‘클러스테린’과 ‘LRP2 단백질’이 식욕 조절에 관여하는 핵심 효소임을 밝혀냈다. 2014년에는 뇌 신경세포에서 안테나 역할을 하는 섬모의 길이가 짧아지면 뇌의 기능 이상을 유발하며 그 결과 비만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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