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와 마음에까지 영향 주는 장내 미생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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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의 칼럼

안성기 대한미래의학회 학술이사
안성기 대한미래의학회 학술이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이전에 감정적 동물이다. 이는 최근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분야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데카르트 이후 400년간 지속된 ‘이성의 시대’의 몰락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미지오 박사의 책 ‘데카르트의 실수’에 잘 묘사돼 있다. 이 책에선 정서와 느낌이 억제되면 초인적 이성을 갖기는커녕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 수도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감정, 공감, 연민과 같은 삶의 단어들이 최근 사회심리학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배가 아프면 나도 모르게 예민해지고 짜증난다. 장에서 시작된 몸의 신호가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불러일으켜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게 만든다. 여자의 경우 생리주기에 따른 몸 내부의 많은 변화가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정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 일상은 감정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 등 내부 장기에서 뇌로 보내는 신호를 인지하는 것을 ‘내부지각’이라고 하며, 우리 몸의 생리적 상태에 대한 감각으로 정의한다. 이 내부지각이 감정과 느낌을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우울한 건 ‘너(외부자극) 때문이 아니라 나(내부자극)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 내부지각을 형성되는 과정에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바로 우리 장에 거주하는 미생물인 마이크로바이옴이다. 이들은 우리의 배 속에서 장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면역반응에 영향을 주며, 다양한 신경활성물질을 만들어 뇌와 마음에 영향을 주고 있다.

도파민, 세로토닌, 가바 등 기쁨, 행복, 평온함과 연관된 대표적인 신경전달물질도 우리의 뇌뿐 아니라 장내 미생물에 의해 만들어진다. 결국 뇌와 장, 미생물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돼 양방향으로 소통을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축에 이상이 생기면 장을 포함한 많은 만성 신체질환을 유발할 뿐 아니라 치매, 파킨슨병 등 뇌질환, 우울 및 불안과 같은 마음의 질환에 영향을 미친다.

건강증진을 목적으로 복용하는 살아있는 미생물을 프로바이오틱스라고 한다. 이제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살아있는 미생물, 즉 사이코바이오틱스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기능성 장 질환인 과민성 대장증후군은 그 원인이 과민한 뇌에 있는지, 과민한 장에 있는지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최근 이 뇌-장 축의 개념을 도입하면 쉽게 해결된다. 현대인의 스트레스 많은 삶은 장에 영향을 주고, 식생활을 비롯한 장 건강의 많은 문제는 뇌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또 최근 과민성 대장증후군의 원인이 장내세균총의 이상, 특히 소장 내 세균의 과다한 증식과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많다. 본인도 이런 개념으로 장이 불편한 환자들을 치료했을 때 좋은 효과를 많이 봤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사촌이 밭을 사면 그 밭에 가서 대변을 보아 거름이 되도록 보태준다’는 본래의 의미가 이기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인간과 미생물의 관계는 공생이라는 본질이 바뀌어 경쟁과 전쟁의 관계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배 속이, 그리고 그곳에 사는 작은 생명들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다면 이 사회에 만연한 시기, 질투, 미움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내가 우울한 건 당신 때문도, 나 때문도 아니고, 그들 때문일 수도 있다. 앞으로 과학이 들려주는 미생물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안성기 대한미래의학회 학술이사
#헬스동아#건강#의료#유산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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