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강재현(54·가명) 씨는 요즘 들어 밤잠이 확 줄어었음을 느낀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던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수면 장애가 온 것인지 또는 어떤 다른 요인이 있는지 궁금했다. 게다가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다. 얼마 전에는 기분 나쁜 꿈을 며칠째 연속적으로 꾸기도 했다.
요즘 들어 달라진 모습이 또 있다. 강 씨는 단체 대화 방에서 30분 넘게 수다를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놀라곤 한다. 예전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것 자체를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사실 강 씨만 그런 게 아니다. 대기업 임원, 변호사 같은 전문 직업인도 그 대화방에서 함께 시답잖은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강 씨는 스스로가 너무 품위 없게 나이를 먹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강 씨가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만났다. ● 중년의 불안은 숙명이다
권 교수는 일단 불면 증세가 잠이 줄어든 것에 대해서는 자연스런 노화의 과정일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나쁜 꿈을 꾸는 것에 대해서는 “잠에서 깼을 때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유쾌한 꿈이든, 불쾌한 꿈이든 그 내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심리 상태에 변화가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권 교수는 이어 “정확한 상태를 알려면 더 전문적으로 꿈을 분석해 봐야 하지만 일단 강 씨의 경우에는 불안감이 꿈으로 표출된 것 같다”고 말했다.
SNS 상에서 중년 남성들이 ‘집단 수다’를 떠는 것 또한 불안 심리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권 교수는 진단했다. 권 교수에 따르면 첫째, 그들에게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정보를 나누려는 심리가 강하다. 둘째, 은퇴 이후 소외되지 않기 위해 소속감을 만들려는 심리도 있다. 마지막으로 불안감을 숨기려고 여성들의 수다처럼 과도하게 채팅을 한다.
권 교수는 “사실 40대 이후의 불안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남자들은 이 시기에 승진과 명예퇴직을 경험하는데, 어느 쪽이든 스트레스가 똑같이 크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이다. 가령 임원으로 올라가면 가정보다는 회사에 신경을 더 쓰도록 강요받고, 그렇지 못하면 회사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 어느 쪽 길이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권 교수는 “실제로 중년 이후에 불안 장애에 갑자기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불안감으로 인해 일상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불안 장애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꼼꼼한 사람이 나이가 들면 강박 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보고서를 쓸 때에도 상사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봐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그러다보니 보고서를 내야 할 기한을 어기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러면서도 선뜻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인지치료를 받아야 한다.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본인이 인정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권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불합리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으면 치료가 의외로 쉬워진다”고 말했다. ● 정신건강 이상 징후 2주 넘기지 말아야
중년 이후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정신장애는 우울증이다. 중년 우울증의 증상은 무척 다양하다.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기본이지만 정상적 상황을 벗어나 양쪽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거나 폭식을 하지만 정반대로 식욕이 떨어져 거의 못 먹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무기력과 불안이 동시에 나타나거나 죄책감이 들 때도 있다.
의학계에서는 이런 증세가 2주 이상 지속되면 질병으로 본다. 권 교수는 “이상 징후가 2주 이상 반복된다면 꼭 병원을 찾아야 한다. 사실 2주도 길다. 1주일 정도 이런 증세가 나타나면 병원을 찾는 게 좋다”고 말했다.
환자가 병원에 가면 우울증인지, 아니면 다른 질병이 원인인지 밝히기 위해 상담과 문진부터 시행한다. 우울증으로 보이지만 갑상샘의 기능이 떨어져 그렇게 보이는 사례도 꽤 많다. 또는 먹고 있던 약 때문에 우울한 느낌이 들거나 술을 마신 후 상습적으로 우울해지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암과 같은 중증 질환이 원인이 돼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여자들은 이 무렵 갱년기가 겹치면서 다양한 신체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자식이 다 커서 독립함에 따라 시간은 많아졌는데 할 일이 줄어들어 심리적으로 공허해지는 중년 여성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회사 일에만 몰두하면 아내의 우울증이 더 심해질 수 있다. 이 경우 부부가 함께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중년 이후에는 육체적 질병과 심리적 질병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한쪽에도 문제가 생기는 식이다. 이를테면 기분이 우울하면 뇌 기능이 떨어진다. 반대로 약을 써서 뇌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면 기분이 좋아진다.
권 교수는 “중년 이후에 심리적으로 건강하면 다른 질병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울증이 있는 중년 암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우울증부터 치료한 환자의 5년 생존율이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4, 5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는 것. ● 라이프스타일부터 바꿔야
정신 장애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병이다. 하지만 그 전에 라이프스타일부터 바꾸려는 노력이 진행돼야 한다. 권 교수는 “중년 이후로는 뇌가 노화하면서 전반적으로 고집이 강해지고 억제력이 떨어진다”며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정신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크게 세 가지 원칙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첫째가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생활 리듬이 깨지면 호르몬의 주기도 바뀌어 버린다. 가령 수면이 불규칙하면 수면호르몬인 멜라토닌의 분비도 불규칙해져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둘째, 유산소 운동을 자주 하는 것이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 ‘BDNF’라는 신경성장 인자의 분비량이 늘어났다. 이 인자는 기억과 학습 등을 담당하는 뇌 해마 부위 신경 생성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셋째가 스트레스 관리다. 권 교수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복식호흡을 추천했다. 스트레칭이나 요가도 괜찮다. 술을 마시면 조금은 기분이 느슨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 흥분할 수 있다. 권 교수는 술은 주 1회 이내로 제한할 것을 권했다.
:: 정신건강에 좋은 10대 생활수칙 ::
1. 긍정적으로 세상을 본다. 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3. 반갑게 마음이 담긴 인사를 한다. 4. 하루 세끼 맛있게 천천히 먹는다. 5.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6. 누구라도 칭찬한다. 7. 약속시간에 여유 있게 가서 기다린다. 8.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9. 원칙대로 정직하게 산다. 10. 때로는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 자료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 ‘소진 증후군’ 예방하는 일곱 가지 팁▼
마음의 에너지가 다 방전된 상태를 ‘소진 증후군’이라고 한다. 외부의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뇌의 시스템에 연료를 충전해주지 않고 에너지만 쓰기 때문에 나타난다. 가장 먼저 의욕이 떨어진다. 동기 부여가 안 되니 성취감도 떨어진다. 또한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권준수 교수는 이때 외부와 단절하고 감성을 충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 교수는 대한의사협회가 2년 전 발간한 ‘대국민건강선언문’에 수록된 일곱 가지 팁을 소개했다. 1. 세 번 깊게 호흡하며, 그 호흡의 흐름을 느껴본다.
출근해서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이나 회의를 시작하기 전, 혹은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호흡하고 느껴본다. 2. 조용한 곳에서 밥을 음미하며 먹는다.
음식의 색깔과 향을 살피고 밥알의 움직임을 느끼며 천천히 먹는다. 자신의 내부 세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하루 10분 사색하며 걷는다.
몸의 움직임을 여유롭게 느껴본다. 그 경우 뇌의 긴장감이 이완되며 마음을 바라볼 수 잇는 여유가 생긴다. 4. 일주일에 한 번 벗과 ‘힐링 수다’를 한다.
지치고 불안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공감을 얻는 수다만한 위로가 없다. 5. 슬픈 영화나 슬픈 작품을 주 1회 감상한다.
즐거운 내용으로 마음을 조정하는 것을 기분전환이라 한다. 너무 기분전환만 하면 마음의 슬픈 콘텐츠를 바라보는 능력이 줄어든다. 6. 일주일에 3편의 시를 읽는다.
사람의 마음은 논리보다 은유에 움직인다. 은유에 친숙해지는 훈련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데 보탬이 된다.
7. 스마트 폰을 집에 두고 당일치기 기차 여행을 한다.
기차 창문을 멍하니 보다 보면 명상 효과가 생긴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힘이 자라난다.
▼ 권준수 교수는 누구? ▼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60)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꽤 알려진 베스트닥터다. 정신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으로 원인부터 규명하는 게 중요하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현재 국내 정신의학계에서 최고 학회로 평가받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권 교수는 특히 강박증과 조현병(정신분열병)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약 20년 전인 1998년 서울대병원 ‘강박증 클리닉’과 ‘정신분열병 클리닉’을 시작한 의사가 권 교수다. 매년 각각 3000명(연인원 기준)이 넘는 강박증, 조현병 환자가 권 교수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
권 교수는 연구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 현재까지 국내외 유명 의학 저널과 과학 저널에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조현병과 강박증을 진단할 수 있는 생물학적 지표를 개발하기도 했다. 또한 정신 질환에 걸리면 뇌에 구조적 혹은 기능적 이상이 생긴다는 사실을 뇌 영상을 통해 밝혀냈고, 이 결과를 고위험군 환자의 예방적 치료에 활용했다.
1999년에는 감마파의 이상으로 감각 정보를 통합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겨 조현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규명했다. 보통 조현병 환자는 시상과 전두엽, 시상과 두정엽의 연결에 문제가 발생한다. 권 교수는 조현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도 이런 문제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최근 추가로 밝혀내 국제 저널 ‘생물정신의학’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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