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가로등 하나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불빛 아래 여자는 동료 서너 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술에 잔뜩 취해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여자가 운전석에 올라타려고 하자 동료들이 이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여자는 유치원 선생이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고 직업에 대한 만족도 크다. 하지만 평소 원장이나 동료 선생들과 잦은 갈등으로 관계가 좋지 않다. 그는 20대 중반으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사람들과의 잦은 불화로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이번이 벌써 6번째 직장이다.
여자는 직장을 옮기고 나서 한동안은 상급자나 동료들과 무척 살갑게 지냈다. 새로운 직장이 마음에 든다며 한껏 들떠서 직장 동료를 세상에 다시없는 친구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사소한 갈등이라도 생길 것 같으면 갑자기 싸늘하게 변해서 다른 동료에게 친했던 이에 대한 불만과 험담을 쏟아냈다. 동료들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보다 못한 원장이 여자에게 한번씩 꾸지람을 하면 울면서 사무실을 뛰쳐나가 며칠씩 잠적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여자의 충동적인 행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출근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서 오는가 하면, 일하다 갑자기 사라져버릴 때도 있다. 어느 날은 혼자 멍하게 핸드폰만 붙잡고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원장은 여자에게 주의를 주지만 그때마다 그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억울함을 토해내며 만취 상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할 때는 꼭 운전을 하려고 했다. 여자의 자동차 열쇠를 뺏으며 말려 보지만 막무가내로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탓에 동료들도 곧 포기하고 말았다.
여자는 감정 기복이 심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은 오후가 돼서는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해졌다. 동료들은 그를 ‘예측하기 어렵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 통제가 안 되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종종 자해를 하기도 했다. 불안하고 답답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 일이 많아질수록 상처는 늘어나고 마음도 피폐해져 갔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자주 불안했다. 엄마가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세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를 찾아 온 집 안을 뒤지고 동네를 헤맸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늘 친구들과 붙어 있으려고 했다. 단짝 친구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친구라며 놀다가도 어찌된 일인지 별일도 아닌 것으로 토라지거나 친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남자친구를 사귀고 나서는 그에게 심하게 의지하고 늘 연락을 해달라고 보챘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조금이라도 답이 늦으면 문자 폭탄을 보내거나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남자친구를 들볶기 일쑤였다. 대학 시절부터는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잠시라도 혼자 있지 못하고 곧바로 새로운 남자를 사귀려고 애썼다.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곁에 있기 위해 비굴하게 매달리기까지 했다.
홍은심 기자 hongeuns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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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TIP
만성적인 불안, 외로움, 공허감, 충동성, 자해시도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주요 특징이다. 불안을 견디는 힘이 매우 약하고 자신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힘든 상황에서 쉽게 자해시도를 하거나 타인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인간의 다양한 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는데 한 사람을 매우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이 바뀌어 ‘천하의 몹쓸 인간’이라며 저주하기도 한다. 내적인 통합 능력이 미숙하고 극단적인 감정을 가진다. 어느 날에는 희망에 들떠 있다가도 한 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한다.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계성 인격장애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여러 가지 경험들에 의해 형성된 인격의 문제다. 힘들고 절망에 빠져 있더라도 상담과 치료를 통해 상처받고 조각난 내면을 하나하나 모아서 통합해야 한다. 특히 절망의 순간에 충동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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