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 72차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총회에서 게임이용장애가 포함된 ICD-11(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게임의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도 지난 2016년에 이미 게임중독의 질병코드화 계획을 포함한 '정신건강 종합대책'을 발표했고, 보건복지부 장관 또한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WHO가 게임이용 장애 질병코드를 최종 확정하면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만큼 게임업계는 사면초가에 몰려있는 상황이다. 다가온 게임 질병의 시대, 국내 게임산업계는 어떻게 대응해야하고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이뤄져야할까. 본지에서 짚어봤다.>
1962년 점과 선으로 연결된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게임 '스페이스워'로부터 시작된 해묵은 게임 질병 논란이 이제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른 모습이다.
게임의 질병 논의를 본격적으로 불러일으킨 것은 지난 5월 25일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제72차 WHO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ICD-11(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이었다.
ICD는 인간의 질병 및 사망 원인에 관한 분류 규정으로 세계 보건 기구에서 발표하는 자료다. 특히, 이번 ICD-11은 지난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ICD-10에 이어 25년 만에 발의된 개정판이라는 점과 1만 4,400종에 불과하던 질병 코드를 무려 4배에 가까운 5만 5,000종으로 늘렸다는 부분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일반 대중과 큰 연관 없이 의학계에서나 사용될 법한 이 ICD-11이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른 이유는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으로 포함해 공식적으로 질병 분류 코드(6C51)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WHO는 ICD-11의 '게임 이용 장애'에 대해 "게임 이용 장애는 게임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게임에 우선 순위가 높아짐에 따라 특정되는 디지털 혹은 비디오 게임 행동 양식의 패턴으로 게임이 다른 관심사나 일상 활동보다 우선 순위가 높아져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함에도 게임을 지속적으로 즐기거나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이 ICD-11은 194개 WHO 회원국에서 2022년부터 적용이 가능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또한 2025년에 ICD-11을 기준으로 KCD(한국표준질병분류) 개정안 논의가 예정된 상황이다.
문제는 이 ICD-11의 게임 이용 장애 결정에 많은 이들이 게임이 공신력 있는 기관인 WHO이 게임을 마약이나 알코올 같은 유해한 중독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ICD-11은 법이 아니며 강제성도 없다. 수 많은 학자들과 연구자들이 발의한 분류 규정이라 하지만, 한번 질병 판정을 받으면 그것이 평생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개정안에서 질병으로 분류된 사례가 삭제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이번 ICD-11에서는 ICD-10에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던 '트렌스섹슈얼리즘'이 삭제됐다. 1990년대 흔치 않았던 트랜스젠더가 겪는 성정체성 혼란에 대해 ICD는 트랜스젠더를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및 '성전환증(Transsexualism)'이라는 '정신 및 행동 장애'로 규정했다.
이 항목은 20년의 세월 동안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이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주기도 했으며, WHO는 이들이 정신장애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며,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항목에서 삭제했다.
황당한 질병 코드도 비일비재하다. ICD-10가 분류한 질병 코드 중에는 '젖소에게 물림'(W55.21), '무중력 환경에서 장기 체류'(X52), '도서관에서의 상처'(Y92.241), '분류되지 않은 기계 및 장치에 대한 의존'(12.Z99.89), '기괴한 외관'(R46.1) 등의 사뭇 이해가 가지 않는 항목도 여럿 발견된다.
이 기준만 따르면 ICD-10 개정 당시(1994년) 분류되지 않은 기계장치인 스마트폰을 자주 사용하거나 단순히 외모가 기괴하다는 이유로 질병 판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항목이고, 실제 발생한 사례에 질병 코드를 부여하기 위해 개설된 것이라 하지만, '게임 이용 장애' 역시 이들과 같은 이유로 분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하나 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것은 이번 ICD-11의 '게임 이용 장애'는 물질중독이 아닌 행동중독에 포함됐다는 것이다.
물질중독은 알코올, 카페인, 대마, 환각제 등과 같은 약물에 대한 자기 조절 능력이 극도로 떨어져 이 약물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함에도 이를 끊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번 ICD-11의 게임 이용 장애는 알코올, 마약과 같은 물질중독이 아닌 도박 등의 행동중독에 포함되었고, 이는 게임 자체가 중독물질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의 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전후관계가 확실한 물질중독에 비해 행동중독은 그 기준이 명확치 않다는 것이다. 한동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신성만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행동중독으로 규정된 이번 ICD-11에서 적용된 '게임 이용 장애'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고, 연구별로 '게임 이용 지속율' 즉 게임 몰입 시간에 대한 차이가 일정치 않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게임 이용 장애를 행동중독으로 분류했음에도 진단 기준이 물질 사용 및 도박 중독 기준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고, 담배나 약물과 같은 금단 현상의 입증이 어려워 게임 장애와 기존 중독 행동과 차이점을 구별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게임 중독 피해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번 ICD-11의 게임 이용 장애 판결은 많은 학자들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ICD-11에 참여한 학자들의 공개 토론 논문을 확인할 수 있는 'AKADEMIAI KIADO'의 자료에 따르면 게임 이용 장애는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점이 드물고, 거의 모든 연구에 임상 연구가 부족하고 표본의 수가 매우 적으며, 순전히 잠정적이거나 추측에 머물러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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