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같은 기초연구 결과물로 ‘대세’ 산업이…오래된 논문을 읽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5일 15시 55분


내 연구의 많은 부분은 남들이 이미 수행한 연구 결과를 다시 공부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논문을 찾아 복사해서 읽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에서 모든 저널의 논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보다 공부의 양이 더 많아졌다. 논문의 참고문헌을 추적해 쫓아가다 보면 1930년대의 논문에까지 도달할 때가 있다. 이미 내가 하고 있는 연구의 실마리를 그 당시 논문에서 발견하게 되면 지금보다도 어려운 시절에 참 멋진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치 고전문학의 견고하고 멋진 문장들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라고나 할까?

과거에 발표된 논문들을 읽다 보면 나 혼자만이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구나, 참으로 똑똑하고 앞서 나간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앞서 나간 사람들에 주눅이 들 때도 많지만 더 분발해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고전적인 논문을 많이 읽어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숙제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과학은 가장 객관적인 검증의 토대 위에서 꽃피우는 학문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검증에 검증을 거쳐 사실을 밝혀내고, 오랫동안 검증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 논문이다.

요즘 잘나가고 있는 산업이 지금 막 시작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브라운관 TV가 사라지고 액정표시장치 디지털 비디오(LCD DV)가 나온 것은 1990년 초반의 일이다. 그 후 LCD가 서서히 책상에서 브라운관 TV를 몰아내더니 이제는 대세가 되었다.

액정은 액체이면서 고체의 성질을 갖는 중간물질로, 1888년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프리드리히 라이니처가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리고 100년 후 이 물질을 이용한 평판 TV가 처음으로 제작됐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역시, 그것의 물리학적 원리는 1950년에 발견됐지만, 2007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거의 60여 년이 지나 TV로 완성된 것이다.

현재 양자점발광다이오드(QLED) TV의 핵심 기술인 퀀텀닷은 1988년에 러시아 과학자 알렉세이 에키모프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퀀텀닷은 크기가 수 나노미터 크기에 불과한 초미세 반도체 입자를 말한다. 2011년 우리나라에서 이 기술을 이용한 퀀텀닷 디스플레이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기까지 23년이 걸린 것이다. 앞으로 이런 개발의 속도는 분명 빨라질 것이다.

액정, 유기물 반도체, 퀀텀닷 물질은 기초연구의 결과물이다. 뭐가 될지 모르지만 흥미로운 연구를 통해 얻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도토리 같은 결과물이 있어 산이 풍요로워지듯 우리의 삶도 풍요로워진다.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도 있고, 도토리묵을 먹기 위해 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바삐 주어가는 사람도 있고, 땅 위에서 썩는 도토리도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산이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기초과학 연구처럼 오랜 시간 돌보고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