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잠시 잊혀졌지만 지난해 한국은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지난해 7월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산업에 미칠 파장을 계산한 듯 일부 소재 품목에 대한 정교한 무역 제재를 선언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비해 열세이면서 기초연구와 산업에서 외면받아 온 이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를 육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사진)은 혼란했던 당시 부처들을 넘나드는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응을 선보이며 주목받은 인물이다. 사태가 터지자 국내외 현황을 분석하는 한편 국내 기술 수준과 성숙도, 국내외 시장 상황을 고려한 100여 개 항목을 선정해 특성에 따라 대응책을 마련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지난해 8월 이를 공식 발표하는 자리에서 “과학기술인의 자신감을 가지고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겠다”며 눈물을 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취임 1주년을 맞아 이달 22일 서울 중구 중앙우체국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 본부장은 “코로나19 대응에 묻혀 덜 눈에 띌지 모르지만 소부장에 대한 대응은 지금도 굳건히 추진하고 있다”며 “공급 안정화가 필요한 20개 항목은 시급한 기술 확보가 필요한 만큼 혁신본부가 직접 챙기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국가 재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에도 소부장 분야 기술경쟁력을 위한 투자는 굳건히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화려한 주목을 받았던 것과 달리 올 상반기 김 본부장의 공식 행보는 거의 드러난 게 없다. 그 대신 그는 ‘잠행’을 이어갔다. 김 본부장은 “내년 예산의 밑그림을 그리던 올 2월부터 9주간 실무 담당 과장 한 명만 대동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60개 이상의 연구기관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전 부처의 연구정책과 R&D 예산 배분을 고민하는 자리에 있는 만큼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었다.
범부처 R&D 예산 배분은 과기혁신본부의 고유하고 독특한 업무다. 일반 예산은 기획재정부 심의를 거쳐 편성하지만 정부 R&D 예산은 매년 5, 6월 과기혁신본부의 배분 조정을 거쳐 편성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한다. 전문가 106명이 4일간 토론하며 각 부처의 사업 타당성을 사전 검토했다. 연구를 수행하는 부처와 진행하는 전략회의도 세 차례 열렸다. 여기에 김 본부장이 “연구 현장과 괴리된 예산 배분은 효과가 떨어진다”며 현장 방문을 추진한 것이다.
김 본부장은 “내년에도 정부의 강력한 R&D 투자 의지는 변함이 없다”고 못 박았다. “지난해 정부가 2020년 R&D 예산을 전년 대비 17% 증가한 24조 원으로 책정해 화제가 됐는데 내년에도 이 기조를 유지하도록 예산 수립 기준이 되는 지출 한도를 약 8% 늘렸다”는 것이다. 그는 내년 정부 R&D 예산도 ‘24조 원+α(알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본부장은 “코로나19 사태에도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 예산 증액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코로나19와 소부장 사태 대응을 위한 투자를 강화하고 R&D 역량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는 등 시급한 현안 대응에 정부가 적극 나서기로 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새롭게 주목받는 비대면 디지털 기술 강화, 데이터 및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인프라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김 본부장은 지난 1년간 과학계가 이룬 가장 큰 소득으로 얼마 전 20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국가R&D혁신법’을 꼽았다. 부처별로 280여 개로 제각각이던 관리규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현장 연구자의 부담을 줄인 법이다. 김 본부장은 “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며 그 근간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며 “법이 시행되는 내년 1월 1일까지 시행령 등 하위 법령을 꼼꼼히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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