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 적용 미뤄져 경제적 부담 여전
의료보장성 강화 ‘문케어’ 취지 무색
급여 논의 서두르고 신약 접근성 높여야
“싼 항암제를 맞으러 말레이시아를 돌아다녔어요. 그나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이제 나가지도 못해요.”
신경내분비종양 치료제 루타테라를 맞는 일부 환자들이 치료비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외 원정 치료를 받고 있다. 신경내분비종양은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걸려 사망한 질병. 루타레라는 지난해 11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긴급도입 의약품’으로 지정해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구입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루타테라 1회 치료 비용은 약 2600만 원. 1사이클 치료에 해당하는 4회 주사를 맞으려면 무려 1억400만 원을 내야 한다. 그래서 약은 있지만 실제 치료는 어려운 상황이다. 루타테라와 유사한 성분으로 가격은 훨씬 낮은(4회 3200만 원)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독일이나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환자들이 생겼다. 지금은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치료마저 불가능해진 상태다. 현실적으로 환자들의 높은 부담을 낮춰주려면 보험급여를 통한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런데 신경내분비종양 환자만 이런 상황일까. 사실 항암 신약 중 접근성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약제는 면역항암제다. 면역항암제의 경우 임상시험을 통해 말기 폐암 1차 치료에서 생존 기간을 2배 이상 연장시킨 사실이 확인됐다. 삶의 질이나 장기생존율 개선 효과도 확인됐다. 하지만 급여신청 이후 현재까지 약 3년이 되도록 첫 관문인 암질환심의위원회 문턱조차 넘지 못한 면역항암제도 있다.
말기 암 환자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면역항암제 급여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폐암 환자들은 30분에 1명꼴로 생사를 달리하고 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약 48명이 폐암으로 사망하고 있다. 첫 급여 신청 뒤 현재까지 폐암으로 사망한 국내 환자는 약 4만6080명(15일 기준)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와 보험체계가 비슷한 영국, 대만 등은 면역항암제 급여를 위해 별도의 재정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면역항암제 급여 논의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다.
기자는 3년 전 혁신 신약의 빠른 허가 속도와는 달리 급여 적용 기간은 너무 오래 걸린다는 문제점을 기사로 지적한 바 있다(본보 2017년 2월 30일자 A30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약’). 당시 많은 암 환자들의 공감을 받았고 복지부로부터 개선책을 찾아보겠다는 답변도 들었다.
하지만 의료보장성을 강화하겠다던 ‘문 케어’는 암 환자들에게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보건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프랭크 리텐버그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에 따르면 신약 접근성 개선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약제비 지출액보다 6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신약 접근성은 31개국 중 고작 19위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해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는 정부 약속만 기다리다 지쳐간다”며 “정부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에게 민간 암 보험에 가입하라고 하거나 공공 암 보험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안 대표는 “이마저도 힘들면 건강보험료를 일부 올리는 데 합의하거나 제약사와 재정분담 논의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 이상의 ‘희망고문’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루타테라를 9월 1일 건보급여로 고시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또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판이다. 코로나19가 재유행하면 면역항암제처럼 암질환심의위원회가 다시 연기될 수 있어서다.
암 환자들은 면역항암제의 다음 달 암질환심의위원회 상정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3년간 굳게 닫혔던 급여 문이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정부는 환자의 간절함을 기억하고, 중증환자를 위한 혁신 신약의 접근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건강보험 급여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혁신 신약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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