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미 영주 식치원 원장(55)은 식치를 실천하며 후대에 전수하려 노력하고 있다. 식치는 음식으로 건강을 다스리는 것으로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건강관리법이다. 조선시대 때도 요즘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같은 전염병이 돌았는데 미리 좋은 음식으로 면역력을 높여 대비했다고 전해진다.
“음식은 문화입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음식 문화가 선비들에게 흘러갔고, 다시 서민들에게 영향을 미쳤죠. 왕실에선 식의(食醫)가 왕의 무병장수를 위해 노력했어요. 식의는 약보단 음식으로 병을 막고 다스렸습니다. 일단 식치를 먼저 하고 실패 했을 때 탕약을 썼습니다. 당시 식의들은 음식과 약은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 원장은 2009년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장이 영주 제민루(濟民樓·조선의 지방 의국)의 유학자이자 의사인 ‘유의(儒醫)’ 이석간 선생이 지은 ‘이석간경험방’을 국역한 것을 바탕으로 식치를 연구하며 재현하고 있다. 이석방경험방에는 115개 병증에 대한 다양한 예방 및 치료법이 망라돼 있는데 신 원장은 그중 식치방에 천착해 현대적으로 해석해 레시피를 만들고 있다. ‘이석간 경험방상(上) 죽과 밥을 이용한 식치방’이란 책도 펴냈다.
그에 따르면 식치는 예방의학이다. 평소에 좋은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먹어 면역력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 그는 “왕실의 식의는 선대왕이 가진 질병을 연구하고 현 왕의 체질을 살펴, 음식으로 병을 예방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다”고 했다. 식치는 그동안 알려진 궁중음식과는 달리 담백하고 자연적인 음식으로 몸을 기를 채운다. 과식을 해도 속이 편하다. “면역력을 높여 예방이 치중했지만 열이 나면 녹두로 죽을 쑤어 내렸고, 잠을 못 이룰 땐 야생대추씨죽을 처방했다”고 했다. 식치의 가장 특별한점은 이렇듯 인체의 증상에 대응하는 처방적 성격의 일상식이라는 것이다. 몸의 허한 곳이 있으면 보해주고, 체질에 따라 해가 되는 것은 못 먹게 한다.
“이석간 선생은 무엇보다 조선시대 왕실 식치 문화를 민간으로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이석간경험방을 남겼습니다. 조선시대에 각도의 관찰사나 지방수령들이 구급방성격의 김정국의 촌가구급방 같은 백성들을 위한 의서를 남기기도 했지만 왕실 의서를 짜깁기하는데 그쳤습니다. 이석간경험방은 민간인들이 쉽게 쓸 수 있게 설명해 식치의 민간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신 원장에 따르면 이석간경험방은 지역 식자재를 활용한 식치방이 주를 이루는 경북 북부의 지방색을 강하게 나타냈다. 또 구하기 쉬운 밥이나 죽 또는 찬류, 찜, 김치 등 다양한 형태로 증상에 대응하는 처방했다.
경남 창원 출신 신 원장은 1992년 경북 예천 출신 박석진 한국폴리텍 영주캠퍼스 산학협력단 단장(56)과 결혼하면서 경북 지역 종가 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신 원장은 남편이 영주캠퍼스에 자리를 잡던 1999년 영주로 이사해 본격적으로 지역 음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2년 무궁화요리학원을 열어 지역 음식 전수에도 나섰다. 지난해 경북 영주시의 도움을 받아 식치를 체험하는 식치원을 개원했다. 음식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위덕대학교 외식산업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2018년)를 따기도 했다.
“가장 영주스러운 게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솔직히 경북은 유학의 본고장인 안동의 영향을 받아 ‘안동문화권’으로 분류되고 있었죠. 그래서 제민루와 연계한 식치 콘텐츠로 영주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음식체험관을 추진한 영주시와 뜻이 맞아 식치원을 개원하게 된 이유입니다.”
신 원장은 “영주 선비들 식치의 뿌리는 조선초기인 1418년(태종 18년) 전국 최초로 건립된 의국 제민루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제민루는 공립의료기관으로 지방의 제약구민(劑藥救民)의 중심 역할을 했다. 영주 소백산 지역은 예로부터 풍부한 약용 식물이 자생했고 제민루가 이를 채취해 한양은 물론 전국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신 원장은 “조선시대 때는 중앙정부가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에 쓰러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민란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을 치료하는 혜민서를 만들고 전국에 의국을 설치해 백성을 돌봤다”고 말했다.
제민루에서 채집한 약재는 중앙의료기관에 모아서 다시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이런 지방의국이 전국에 6~7개 정도 있었는데 제민루는 최초로 만들어져 다른 지방의국 운영의 본보기 역할을 했다. 제민루는 약재 공급을 뛰어 넘어 의생과 향촌의 성리학자들이 의학적 지식을 쌓는 공간이었다. 퇴계 이황 선생도 제민루에서 이석간 선생과 함께 공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 원장은 “지방 향리인 선비들도 백성들이 병들지 않게 하기 위해 예방의학을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방에서 선비는 백성의 리더역할을 해야 한다. 서민은 물론 노비와 천민까지 식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신 원장은 “조선시대 때는 음식이 아녀자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다. 식자재의 효능을 알고 있는 사람들, 즉 왕실의 어의와 식의, 그리고 선비들이 식치를 알고 있었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석간 선생도 영주 지역의 특산물을 연구해 최초의 민간 의서를 남기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조선 왕 중에서는 세조와 정조, 영조가 식치에 관심이 많았다. 세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식의서인 ‘식료찬요’의 서문을 섰다. 정조는 식치를 제대로 알고 몸이 안 좋을 땐 직접 특정 음식을 올리라고 지시까지 했다. 영조는 5끼를 먹던 왕의 식사법에서 3끼만 먹고 장수했다. 특히 영조는 엄청난 양의 인삼을 드신 것으로 전해진다. 신 원장은 “세종과 문종, 세조 때 의관 전순의는 의학서인 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했고 산가요록, 식료찬요 등 식의서를 남겼다. 이게 선비들에게 전해졌고 민간에까지 흘러갔다”고 했다. 의방유취는 동양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그중 식치방은 안상우 박사팀이 국역본을 2018년 12월에 발간했다. 의방유취는 의림촬요와 함께 동의보감의 모태가 된다.
신 원장은 “선비들은 궁극적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추구했다. 일찍 병드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게 식치고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런 좋은 미덕이 일본의 식민지배와 6·25전쟁을 통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힘든 시기 인간 이하의 삶 속에서 먹고 살기에 바쁘다보니 식치 문화가 사라졌다. 그저 배를 채우는 데 급급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식치를 다시 되새겨 생활화한다면 코로나19를 넘어 어떤 전염병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식치를 재현하며 세미나를 여는 등 식치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그동안 알려진 궁중음식이 한 축이라면 이렇게 몸을 음식으로 다스려 건강해지려는 식치도 한 축입니다. 그동안 식치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일제의 침탈과 6·25 전쟁도 있었지만 유학과 한의학까지 통달해야 이해할 수 있었기에 연구가 부족한 측면도 있었죠. 식치의 전통은 의료문화속에 이어져 상대적으로 음식문화속에 보편화되기 어려웠습니다. 식치가 의료문화든 음식문화든 세상 밖으로 나와 국민건강에 더 이롭게 다가간다면 한식의 폭넓은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신 원장은 조선시대의 의학에 관심이 많은 안상우 단장은 물론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와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김 교수는 조선왕실의 의료문화란 저서를 내기도 했다. 신 원장은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식치를 알려면 유학 사상도 잘 알아야 하고 한의학에도 능통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지난해 국회 식치 재현 및 학술대회도 함께 열었다.
신 원장은 장기적으로 제민루의 복원을 꿈꾼다. 사실 제민루가 조선시대 의국으로 재조명 받은 것도 신 원장의 노력 때문이었다. 이석간경험방을 공부하다 보니 이석간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제민루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알았고 제민루가 의국에서 다른 시설로 변용되면서 잊혀졌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신 원장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다시 문을 열어도 되겠다는 판단에 다양한 학술대회를 통해 제민루를 조명하고 있다. 신 원장은 “제민루가 현대적의미의 의국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 안에서 식치방을 만들어 후대에 식치를 전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기자도 현장 취재한 6월 19일 영주 식치원에서 ‘중풍을 예방하는 동마자율무죽이 포함된 식치’를 체험했다. 이석간경험방에 이 식치로 몸을 다스릴 경우 ‘노인이 18세 청년처럼 뛰어 다닌다. 흰 머리도 검게 된다’고 돼 있다.
식전주인 ‘동아약주’를 시작으로 동마자율무죽, 오랄초로 맛을 낸 수정냉도회(돼지껍데기와 돼지고기 허구리살에서 콜라겐을 추출해 수정처럼 맑게 만든 묵), 황자계혼돈(꿩고기와 누런 암탉을 이용한 석이콩가루피 만두), 천초 영주한우 육회, 가마보코(해삼, 전복, 석이, 귤홍을 감싼 숭어어묵), 설하멱적(어간장을 이용한 쇠고기 구이), 진주면(임자를 갈아 넣은 청포기장면), 어만두 길경탕(죽순과 도라지로 맛을 낸 어만두탕), 치유 부빔밥(모점이법, 백두옹과저, 자소엽, 배추침채, 방풍 매실육 등이 들어간 비빔밥), 돌쌈씨 우무쥐눈이콩불과 상심자 무스(디저트).
음미하며 먹다보니 2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모든 음식을 장시간 익히고 달이고를 반복해서인지 속이 편안했다. 신 원장은 “죽을 예로 들면 쌀을 싸라기로 만들어 쪄서 다시 불리고 찌고를 반복해서 죽을 쑨다. 위에 전혀 부담이 없다. 양념도 된장을 쓰니 몸에 나쁠 수가 없다”고 했다. 설하멱적도 좋은 쇠고기를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 뒤 간을 하고 참기름으로 버무려 굽고 얼음물에 담그기를 반복해 만드니 많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단다. 기자는 난 12시부터 오후 2시까니 식사를 한 뒤 취재를 하고 오후 4시 버스를 타고 동서울로 올라와 오후 9시에야 평창동 집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식치는 자연식이면서도 배를 든든하게 채워줬다.
신 원장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죽을 권했다. “선조들은 계절에 맞는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식재료로 죽을 쒀서 틈나는 대로 먹었다. 앞에서 얘기했듯 찌고 불리고를 반복해 쑤기 때문에 전혀 탈이 나지 않는다. 하루 5회 장복하면 체질이 면역성으로 바뀐다. 바쁘다고 샌드위치에 우유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우리 몸에 좋다”고 했다.
눈이 안 좋을 땐 돼지간죽, 불면증엔 야생대추씨죽, 감기 예방엔 근시(곶감)죽…. 식치 법은 수 백 가지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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