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1987년 “DNA로 친자확인” 광고서 힌트… 연쇄 성폭행범, 유죄 선고 첫 사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17일 03시 00분


유전자 분석, 언제부터 범죄 증거로 활용됐을까
플로리다서 유사 수법 성폭행 20건… 검찰, 용의자 잡았지만 증거 부족
유전자업체 도움 받아 DNA 검사
법정서 증거 인정… 100년형 선고

1986년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참혹한 성폭행 사건 20여 건이 연달아 벌어졌다. 범인은 오리무중이었으나 동일인으로 추정됐다. 범죄 수법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몇 주 동안 피해자를 몰래 쫓아다녔고, 열려 있는 창문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얼굴을 보지 못하게 협박했고, 현장엔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7년 2월, 또다시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수법이 거의 똑같았다. 흉기로 피해자를 위협하며 “얼굴을 쳐다보면 해치겠다”고 했다. 피해자는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저항 과정에서 범인의 얼굴과 다리 등에 상처를 냈다. 그런데 이번 현장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이 발견됐다.

당시 과학 수사 기술은 혈액이나 체액 등에 있는 단백질을 분석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의 체액을 분석해도 범인으로 단정할 만큼 정교한 결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사건 다음 달 누군가의 신고로 용의자가 붙잡혔다. 토미 리 앤드루스라는 20대 남성이었다. 현장에 남아있던 지문과 앤드루스의 오른손 지문이 일치했다. 이번에 발생한 사건의 범인이 맞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비슷한 수법으로 저지른 1986년의 성폭행 사건들도 앤드루스의 짓일 가능성이 강하게 의심됐지만,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마땅치 않았다.

이때 마침, 고심을 거듭하던 검찰의 눈에 한 잡지에 실린 광고가 띄었다. 뉴욕에 있는 ‘라이프코드(Lifecodes)’라는 업체가 낸 광고로, “우리가 보유한 유전자(DNA) 검사 기술을 활용하면 친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 내부에서 이 기술을 활용하면 새로운 증거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고, 업체 측도 “유전자 검사를 범죄 수사에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대답해 왔다.

라이프코드는 혈액뿐만 아니라 죽은 조직 등에서 유전자만 발견할 수 있으면 자신들의 ‘제한효소 절편길이 다형성(RFLP) 검사’라는 감식 기술을 활용해서 일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발견된 체액과 앤드루스의 혈액, 피해자의 피에서 각각 검출한 유전자를 비교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라이프코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액의 유전자와 용의자 앤드루스의 유전자가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8억3991만4540분의 1이다”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다시 말해, 범인과 앤드루스의 DNA가 100%에 가까운 확률로 일치한다는 뜻이었다.

검찰이 제시한 DNA 검사 결과는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됐다. 하지만 1심에서는 배심원단의 의견이 엇갈리며 평결을 내리지 못했다. 검찰은 재심에서 절치부심했다. 증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상세히 준비했다. 결국 DNA 검사 결과가 모두 결정적 증거로 인정받았다. 앤드루스는 성폭행 등의 혐의가 인정돼 100년이 넘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앤드루스 성폭행 사건’은 세계에서 DNA 분석 결과가 근거로 채택돼 유죄가 선고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당시만 해도 너무나 생소했던 ‘유전자 지문(DNA fingerprint)’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범죄 수사와 혐의 입증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학 기술로 자리 잡았다. 미국은 1990년대 말부터 연방정부 차원에서 유전자 정보 은행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2018년에는 민간 유전자 데이터베이스(DB)를 활용해 1970, 80년대 12명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는 연쇄살인범을 검거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유죄 선고#유전자 분석#연쇄 성폭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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