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투기 광풍이 거세다. 2017~2018년 대한민국에 불어 닥친 ‘가즈아 열풍’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코인에 투자금을 넣으면 넣은 만큼 돈이 복사된다고 해서 ‘돈복사’라고 불릴 정도다. ‘한탕’을 노리고 불나방처럼 너도나도 투기열풍에 뛰어든다. ‘도박판’이 따로 없다. #최지원씨(35)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최근 여러 단체채팅방을 뜨겁게 달궜던 소문 때문이다. A기업에 다니던 사람이 ‘도지코인’에 2억원을 투자해 수백억원을 벌어 퇴사한다더라는 내용이었다. 어느 단체채팅방이든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결론은 다들 비슷했다. “일하기 싫네요.”
최씨는 최근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 주변에서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큰 수익을 봤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허탈해졌다.
안그래도 회사에서 받는 ‘작고 귀여운 월급’을 10년, 20년 모아도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있을지도 모를만큼 부동산이 크게 오른 것도 억울한데, 최씨는 암호화폐 투자로 하루에도 자신의 월급보다 몇배는 되는 돈을 번다는 인증글을 볼 때마다 우울해졌다.
◇암호화폐 ‘대박’ 소식에 상대적 박탈감과 근로의욕 저하 호소하는 2030
최근 세계적으로 암호화폐에 막대한 자금이 몰리면서 국내에서도 암호화폐 투자에 열을 올리는 개인투자자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암호화폐 투자를 하지 않는 2030세대 중 상당수가 ‘상대적 박탈감’과 그에 따른 ‘근로의욕 저하’를 호소하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큰 돈이 몰린 암호화폐 시장에 일찌감치 투자한 일부 투자자들이 막대한 수익을 봤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면서 이같은 상대적 박탈감을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암호화폐 거래사이트 ‘업비트’에 따르면 최근 6개월간 상승률 상위를 기록한 코인인 Δ칠리즈(5321.49%) Δ 쎄타퓨엘(3239.13%) Δ스톰엑스(2680.59%) Δ비트토렌트(2464.10%) Δ메디블록(2375.25%) 등의 가격은 지난해 말에 비해 약 23~53배 상승했다. 1000만원만 투자했어도 수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볼 수 있었던 셈이다.
요 근래에도 도지코인이 별다른 호재 없이도 일론 머스크의 트윗 하나에 1개월 사이 644.81% 급상승하며 해당 암호화폐에 투자한 사람이 수백억원을 벌고 퇴사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30대 직장인 홍성훈씨(34)는 “일부 사람들의 한탕주의라 생각했는데, 주변에서도 모두 코인투자를 하고 큰돈을 번 사례도 나오니 이전처럼 성실히 근로하는게 맞는건지 혼란이 온다”며 “오히려 너무 틀에 갇혀 있던 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 ‘성실히 열심히 일하는 보람’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박희원씨(30)도 “일을 해야 하는데 순식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암호화폐 탓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며 “운 좋게 급등하는 암호화폐에 돈을 넣어뒀으면 한 달 수입 이상을 벌기도 하는데, 한 달 내내 일하는게 요즘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잃은 사람, 박탈감 느끼는 사람, 덜 벌어 아쉬운 사람…‘모두가 불행’
이같은 열풍 속에서 암호화폐 투자로 돈을 잃은 사람도, 투자를 하지 않은 사람도, 심지어 돈을 번 사람까지 모두가 불행해지는 모습이다.
급등하는 ‘알트코인’(비트코인 이외의 암호화폐)에 투자했다가 몇달치 월급을 날렸다는 한모씨(31·여)는 “급상승하고 있는 알트코인에 혹해 돈을 투자했는데 순식간에 가격의 20%가 빠졌다”며 “더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손절했는데 나중에 보니 잃어버린 만큼 다시 가격이 올랐던 기억이 있다”며 울상을 지었다.
따로 암호화폐 투자는 하지 않는다는 고모씨(33·여)는 “이전까지는 그래도 별 생각 없었는데, 도지코인으로 수백억원을 벌었다는 ‘지라시’를 본 뒤로 아등바등해서 겨우 이만큼 벌고 있는 내 모습과 비교돼 매우 허탈했다”면서도 “하지만 어차피 돈을 벌 사람은 그만큼 ‘시드머니’가 있고 배포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하기 힘들 것 같아 암호화폐 투자는 앞으로도 감히 손대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100만원으로 암호화투자를 시작해 한 달 만에 벌써 3000여만원을 벌었다는 취업준비생 권현준씨(26)는 돈을 벌었지만 자신은 ‘운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더 큰돈을 벌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권씨는 “정부가 세금을 크게 매겨 암호화폐 투자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기가 오래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지금 본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게 너무 아쉽다”며 “일찍 직장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이젠 직장 자체보다 투자에 쓸 수 있는 ‘시드머니’를 확보했다는 점이 부러운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미 근로소득의 가치가 떨어진 시대…암호화폐는 한탕주의 부추겼을뿐
사실 이처럼 근로소득에서 의미를 잃은 2030세대의 모습은 암호화폐 열풍이 불기 전부터도 이미 조짐이 보였다. 24시간 거래가 이뤄지고 상한가, 하한가도 없이 오르락내리락이 심한 암호화폐 투자는 이를 극단적으로 부추긴 것에 불과하다.
지난달 한국경제연구원이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일자리 전망 국민인식’에 따르면 응답자의 32.9%가 소득향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식 부동산 등 재테크’를 꼽았다. ‘업무역량 강화 및 승진’(14.9%), ‘창업’(9.1%)을 합한 것보다 많은 비율이다.
실제로 통계청이 지난 2월 발표한 ‘2019년 임금 근로 일자리 소득(보수) 결과’에 따르면 20대와 30대의 월 평균소득은 각각 221만원과 335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10년을 모아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인 10억9993만원(2021년 3월 기준)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결국 근로소득의 의미가 약해진 세태 하에서, 위험부담은 크지만 기대 수익률이 높은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어 ‘한 탕’을 노리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국내 암호화폐 열풍의 모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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