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전문기업 오비맥주는 연간 30톤 이상 생기는 맥주 부산물(맥주를 만들기 위해 곡물에서 당과 전분을 빼내고 남은 맥주박, 효모 등)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에 빠졌다. 맥주 부산물은 식품으로 쓸 수 있고, 저칼로리에 고영양이다. 최근 맥주 부산물로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규제도 완화됐다. 이 문제를 잘 풀면 모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 사례가 될 법도 했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비맥주는 모기업 AB인베브의 오픈이노베이션(기업이 내부 자원을 공개, 외부 기업과 함께 기술이나 상품을 만들며 혁신을 시도하는 것)사례 ‘100+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참고했다. 지속경영, 친환경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을 발굴해 100년 가는 기업이 되도록 돕는 지원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한국에 도입하려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답답한 마음에 오비맥주는 서울창업허브(SBA)의 ‘글로벌 스타트업 밋업’을 찾았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한 스타트업들의 경연 무대다. 스타트업 50곳이 참가했고, 심사 끝에 8곳이 남았다.
스타트업 RE:harvest(리하베스트) 민명준 대표가 발표할 차례였다. 리하베스트가 제시한 상품은 맥주박으로 만든 에너지바다. 맛은 기존 에너지바와 비슷하지만, 칼로리는 훨씬 낮은데다가 보리와 밀 등 원재료의 영양소를 거의 그대로 담았다. 민명준 대표는 2019년 기준 49조원에 달할 정도로 커진, 해외에서 모범 ESG 사례로 꼽히는 음식 부산물 재활용 기술 ‘푸드업사이클링’ 기업이라고 리하베스트를 소개했다.
민명준 대표의 발표를 듣는 순간, 오비맥주 CV 담당자는 ‘무조건 이 스타트업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오비맥주 임원진은 만장일치로 리하베스트를 파트너로 맞았다.
스타트업이 아이디어를 내고 기술을 마련하면, 대기업이 내부 자원을 활용해 이들을 이끈다. SBA는 스타트업과 대기업 사이를 견고하게 연결한다. 자연스레 시너지가 배어나온다. SBA가 꿈꾸던, 대기업과 스타트업 동반 성장 모델의 1기 성공 사례가 탄생한 순간이다.
오비맥주와 리하베스트, SBA의 밀월 관계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끈끈하다.
오비맥주측은 심사 당시 리하베스트가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고, ‘10을 생각했는데 그 이상을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혁신과 함께 친환경, 지속가능한 성장 솔루션을 원하던 오비맥주는 리하베스트를 만나 모범 ESG 사례를 만들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업은 간혹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자금이 많고 규모가 큰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기술과 인재, 특허를 빼앗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오비맥주는 애초에 지분 투자나 인수를 고려하지 않고 스타트업과의 협업과 오픈이노베이션을 바라봤다고 강조한다. 구매팀 안에 신사업부서로 지속경영팀을 만들고, 더 많은 스타트업과 더 많은 ESG 사례를 만들기 위해 밋업 스타트업을 매년 열겠다고도 밝혔다.
민명준 대표도 오비맥주와 SBA 덕분에 성장했다며 엄지를 올렸다. 컨설팅, 음식 스타트업 창업 경험을 가진 민명준 대표였지만, 사업 초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하고 싶은 일이자 즐겁고 보람 있는 푸드업사이클링 기업을 세운 것은 좋았지만, 사업화 자금이 문제였다.
그 때 민명준 대표에게 손을 내민 것이 SBA였다. SBA는 리하베스트에게 사업화 자금, 공간을 지원하고 투자하려는 기업들의 무리한 요구도 막아줬다. 그는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 완충재 역할을 해준 SBA를 믿음직한 파트너로 여기고, 사업상 고민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민명준 대표는 가치관이 같은 대기업 오비맥주가 파트너라는 점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다. 오비맥주 담당자와 이야기하며 ‘ESG 유행 전부터 친환경 경영을 생각했다’는 느낌을 받은 점, 리하베스트를 투자 대상이 아닌 파트너로 보고 일한다는 점이 인상깊다고 말했다.
최수진 SBA 파트장은 과거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스타트업 발굴과 밋업까지는 잘 됐지만, 그 이후 관리·지원이 부실했다. 그 결과 유망한 스타트업이 사라지는 사례를 수차례 봤다. 최수진 파트장이 생각한 것은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실질 협력 모델, 어느 한쪽만 성장하는 것이 아닌 동반 성장하는 모델이다.
이 모델을 만들기 위해, 먼저 스타트업의 고충에 귀를 기울였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 특히 초기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자금이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사업을 논의한 후, 정작 상품을 만들 자금이 없어 협업이 무산되는 사례가 잦았다. 그러니 대기업은 투자를 망설인다. 기술만 제공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최수진 파트장은 SBA가 대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래서 SBA가 대기업과 먼저 논의를 마치고, 스타트업의 기술을 보호한 채 함께 성장하는 모델을 구상했다. 스타트업의 업무 공간을 제공하고 언론과 투자사와의 만남을 주도하는 것도 SBA의 몫이다. 그 첫 사례가 오비맥주와 리하베스트다.
최수진 파트장은 민명준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를 아직 기억한다. 적극적이면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자세에 호감을 느껴 SBA가 가진 모든 루트를 연결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오픈이노베이션을 고려하던 오비맥주와 만났다. 공장을 보여주며 의견을 묻는 적극성, 진지하게 ESG 사업에 임하려던 오비맥주와 민명준 대표를 연결한 것은 정답이었다.
오비맥주, 리하베스트, SBA는 지금도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나눈다. 리하베스트의 맥주 부산물 가공품은 밀가루를 대체할 수 있다. 에너지바뿐만 아니라 피자 도우, 면, 과자로 만드는 것도 된다. 그러면서도 밀가루보다 칼로리는 적고, 식이섬유를 비롯한 영양소는 풍부하다. 지금까지는 버리던 맥주 부산물을 가공해 상품화하기에 생산 원가도 낮다.
민명준 대표는 밀가루를 쓰는 모든 식품 부문에 리하베스트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여기에 세계 맥주 점유율 30%을 가진 좋은 파트너 오비맥주, 항상 함께 성과를 만들어온 SBA와 함께 꾸준히 좋은 사례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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