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미국 서해안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인접한 계곡 인근을 일컫는 지명이다. 실리콘(규소)을 주 재료로 하는 반도체 제조사가 많이 모여 들면서 붙은 이름이지만, 현재 각종 첨단 기술 기업 본거지이자 스타트업 메카로 여겨진다.
과거 실리콘밸리는 양질의 포도주 생산 지대였다. 하지만, 1953년 스탠퍼드 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전자산업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지금의 실리콘밸리로 재탄생했다. 현재 애플을 비롯해 휴렛팩커드(HP), 인텔, 페어차일드, 텐덤, 에버노트 등 4,000여 기업이 운집하고 있으며, 미국 전자공업협회(AEA) 본부도 이곳에 있다.
실리콘밸리가 스타트업 메카로 불린 계기는, 8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39년, 휴렛과 팩커드가 스탠퍼드 대학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 스탠포드 대학교 동기인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의 한 차고에서 휴렛팩커드를 설립했다. 이들이 개발한 음향 발진기를 시작으로, 지금의 휴렛팩커드가 등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난 1989년, 캘리포니아 주는 HP가 탄생한 에디슨가 367번지의 허름한 차고를 '실리콘밸리 발상지'로 명명하고 사적으로 등록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기업으로 말미암아 과수원만 가득하던 산타클라라 계곡이 IT 업계의 중심지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지금의 실리콘밸리 뿌리는 대학 캠퍼스에 있다. 중국의 중관촌도 비슷하다. MS의 빌게이츠,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역시 대학시절 창업해 기술과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대학가 창업, 캠퍼스 혁신’은 전세계 경제와 산업을 바꾸고 있다.
비단 해외만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에도 전 세계 어떤 도시와 견주어봐도, 손색 없는 서울이 있다. 서울시 내에는 50개 이상 대학이 밀집해있다. 서울 역시, 우리의 혁신 경쟁력, 급변하는 미래 속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대학과의 협력에서 찾는다.
서울캠퍼스타운을 통해 탄생한 646개의 스타트업
그 대표적인 사업이 바로 ‘서울캠퍼스타운’이다. 서울캠퍼스타운은 대학이 보유한 인적‧물적 자산을 활용하고, 시와 대학, 지역이 협력해 청년창업과 침체된 대학가를 동시에 활성화하는 사업이다. 예비창업가 대상으로 창업공간을 제공하고, 전문가 멘토링‧투자유치 특강 등 창업육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주민 대상 교육, 상인 역량 강화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역활성화를 도모한다. 오세훈 시장 재임 당시인 2009년부터 논의를 시작, 현재 서울시내 34곳에서 조성‧운영 중이다.
서울시가 서울캠퍼스타운 사업을 본격화한 2017년 이후, 지난 4년간 배출한 창업팀은 646개에 달한다. 사업 첫 해 87개였던 창업팀은 646개(640%↑)로 늘어났고, 창업지원시설은 24개소에서 72개소(200%↑)로 증가했다. 매출액은 3억 8,000만 원에서 347억 원(9,031%↑)으로, 투자유치액은 44억 원→252억 원(472%↑)으로 각각 크게 상승했다.
수치적인 증가와 함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속도다. 캠퍼스타운이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는 창업성장 노하우와 같다. 각 캠퍼스타운과 창업기업별로 쌓인 노하우를 통해 스타트업의 성장과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올해 서울시는 서울캠퍼스타운 창업기업이 1,000호를 돌파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서울대와 숙명여대, 연세대 등 10여개 학교에서 창업지원공간 20여개소를 추가 중이란 계획과 36개 대학교에서 369개 창업기업을 육성 중이라고 덧붙였다. 4년 만에 총 1,015개(누적)의 스타트업이 탄생하는 셈이다.
바이오, 인공지능 전문 교수가 참여하고 있는 창업
대학 캠퍼스가 스타트업의 산실, 요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는 빌게이츠,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 즉, 인재다. 서울캠퍼스타운도 마찬가지다. 바로 전문연구진, 전문가 집단이 두텁고 다양한 자체 생태계를 보유한다. 특히, 많은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한 교수들도 캠퍼스타운 창업에 나서고 있다.
서울시 캠퍼스타운 창업 지원의 주 대상은 대학생과 졸업생 등 청년이지만, 교수·연구원 등을 대상으로 하는 ‘교원 창업’, 졸업 후 사회로 진출해 경험을 쌓고 대학으로 돌아온 이들에게 ‘연어형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다. 실제로 현재,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캠퍼스타운에는 9명의 교수가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캠퍼스타운에서 교수창업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곳은 서울대 캠퍼스타운이다. 서울대 캠퍼스타운에는 바이오·인공지능(AI) 기술을 바탕으로 혁신 제품을 개발 중인 엔테라퓨틱스, 지니얼로지, 오르조영제, 라트바이오 등 4개 교수창업이 포함되어 있다.
엔테라퓨틱스(대표: 강재승 교수)는 나노 입자를 이용해 암과 바이러스 감염 질환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난치성 종양인 뇌종양, 췌장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 질환 치료제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최근 나노입자를 이용해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한 약물연구 개발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치료제와 함께 나노 입자를 활용한 진단 시약 연구개발도 함께 진행, 뇌종양 수술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진단 시약을 개발해 이에 관한 특허를 출원했다.
지니얼로지(CTO: 한범 교수)는 AI기술을 활용해 유전자를 예측하고 분석하는 플랫폼을 제작 중이다. 기존 HLA(Human Leukocyte Antigen, 조직접합성항원) 검사는 건당 1,000달러 이상의 비용과 1주일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에 지니얼로지는 DNA 데이터를 사용해 HLA유전자, 유전형, 아미노산 서열을 높은 정확도로 예측·분석하는 AI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비용은 1/10로 줄이고, DNA데이터만 업로드하면 즉시 검사결과를 확인할 수 있어, 면역항암치료, 중증 약물 알레르기, 조혈모세포 이식 등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해 5년차를 맞은 고려대 캠퍼스타운도 지난 2020년 교수 창업팀이 입주했다. 고려대 의과학과 김현수 교수가 근육 감소를 억제하는 치료제를 개발 중으로, 2019년 마이오텍사이언스을 설립했다. 2016년 질병코드를 부여한 근감소는 현재까지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 근감소는 다양한 종류의 약물에 의해서도 나타나지만 65세 이상 노인에게서 치명적인 건강 위험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근감소 치료제 개발은 항노화 산업의 핵심기술로 여겨진다.
마이오텍사이언스는 근감소 억제제를 개발할 수 있는 연구 플랫폼을 구축해 다양한 종류의 원천 물질을 발굴하고, 약물로서의 개발 가능성을 검증해 신약을 개발하고자 한다.
숭실대 창업팀 배랩(대표: 배원규 교수)은 ‘고통없이 자가 접종이 가능한 마이크로 주사기(Micro Injection)’ 개발을 완료했다. 마이크로 크기의 독사어금니 구조로, 피부 각질을 통과해 빠르게 진피 안으로 유효성분을 전달하는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바늘 구조물 크기는 마이크로 단위이기 때문에 혈관을 건드리지 않는데, 이는 의료기기 법상 스스로 접종이 가능한 주사기로 분류 된다.
해외 진출 시동걸고 있는 스타트업들
해외로부터 주목 받는 창업기업도 하나, 둘 늘고 있다. 네이버 스타트업 양성 조직인 D2SF(D2 Startup Factory)와 카카오벤처스가 공동 투자를 결정한, 서울대 캠퍼스타운의 디지털 헬스 스타트업 '이모코그'다. 이모코그는 치매선별검사를 개발 중이다. 정확하게는 경도인지장애 디지털치료제를 개발한다. 경도인지장애는 동일 연령 대비 인지 능력이 감퇴했으나 일상생활은 수행할 수 있는 치매 전 단계를 뜻한다. 치매 조기 진단 및 증상 완화를 위해 결정적인 시기다.
이모코그 창업진은 서울의대 정신과학교실 노인정신겅강 전문의이자, 경도인지장애와 치매환자를 20년간 치료한 현장 경험을 가진 이준영 공동대표와 전 중앙의대 해부학교실 교수로 여러 약물을 통한 뇌 기능 개선 연구한 노유헌 공동대표 등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이모코그의 디지털치료제는 질병 치료를 위해 환자 행동이나 생활양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소프트웨어다. 현재 오프라인과 AI 스피커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축적된 연구데이터와 논문으로 검증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캠퍼스타운 기업인 ‘비즈니스캔버스’는 북미 진출을 추진 중이다. 2020년 7월 창업한 후 현재까지 소풍벤처스, 신한캐피탈 등으로부터 투자 받았다. 지난 5월, 20억 원의 후속투자를 유치했다. 무엇보다 창업멤버 이력이 화려하다. 미국 하버드대, 예일대, 스탠포드대, 뉴욕대, 영국 런던정경대, 한국 서울대 출신 등으로 구성된 스타트업으로 효율적인 문서 작성을 지원하는 웹 기반 소프트웨어 '타입드(Typed)'를 개발 중이다.
선배와 후배가 함께하는 성장을 꿈꾼다
실리콘밸리에는 연쇄 창업을 표현하는 ‘페이팔 마피아’, ‘구글 동창회(Google Alumni)’ 등과 같은 대명사가 있다. 창업후 성공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는 형태로, 서울캠퍼스타운에도 선배 기업이 후배 기업을 지원하고, 서로 협력하며 동반성장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창업 3년차인 서울캠퍼스타운 스타트업 수호아이오는 위메이드트리로부터 5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는데, 이는 고려대 캠퍼스타운 창업기업 선‧후배 기업간 네트워크와 멘토링으로 이뤄진 첫 번째 성과다. 수호아이오는 소프트웨어 보안 전문가들이 모여 설립한 스타트업으로, 스마트 컨트랙트 자동 분석 서비스 ‘오딘(Odin)’을 국내외기업에 제공하고 있다.
수호아이오의 투자유치 성공 배경에는 고려대 캠퍼스 1호 창업기업이자, 자체 공장을 가동 중인 선배기업 에이올코리아의 지원사격이 컸다. 에이올 코리아의 백재현 대표는 후배 창업기업 육성을 목적으로 투자자와 후배 혁신 기업을 이어주기 위해 지난 2020년 10월 ‘네트워킹 프로그램’ 정기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수호아이오는 VC를 소개 받아 투자유치를 위한 조언을 들었고, 이는 투자유치로 이어질 수 있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지금 스타트업은 무한 경쟁 체제다. 성공을 꿈꾸며 도전하는 나라별, 지역별 스타트업 생태계는 포화 상태에 가깝다. 하지만, 1,000만 인구에 50개 이상의 대학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 분명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아이디어와 연구 산실인 대학을 통해 청년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 부족한 경험은 교수, 선배와 역사가 대체할 수 있다. 무한경쟁의 시대 속, 서울 안에서 청년이 꿈을 이루고 도전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밑천이 대학에서부터 시작되고, 확대될 수 있도록 캠퍼스타운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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