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현대중공업이 연말까지 길이 300m의 초대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에 인공지능(AI)이 조종하는 자율운항 시스템을 장착해 시험 운항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AI가 조선산업 전반에 도입되면서 선박 기술의 패러다임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특히 ‘AI 선장’이 선박을 조종하는 자율운항 선박 기술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세계 조선업 1위인 한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 원격제어 가능한 2단계 자율운항 솔루션
6월 현대중공업의 선박 자율운항 자회사인 아비커스는 경북 포항시 운하에서 소형 자율운항 크루즈의 시험 운항에 성공했다. 12인승인 이 소형 선박은 사람의 개입 없이 50분간 사고 없이 운하의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비커스가 개발한 자율운항 솔루션 ‘하이나스(HiNAS) 2.0’은 사람 대신 AI가 선장 역할을 한다. 자율주행차에 적용되는 카메라와 라이다(레이저 레이더)를 선박에 달아 항로 주변을 감시하고 어선이 출몰할 경우 증강현실(AR)로 이를 알린다.
김대혁 아비커스 연구개발(R&D)팀장은 “그간 선박의 눈 역할은 레이더가 전담해왔지만, 전방 수km 내 가까운 거리에서는 레이더보다 카메라의 감지 능력이 뛰어나다”며 “선박 주변을 상시 감시해 블랙박스 역할을 수행하는 ‘하이바스(HiBAS)’ 시스템도 개발했다”고 말했다. 아비커스는 내년 1월 열리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CES에서 AI 선장을 탑재한 요트형 레저 보트를 공개할 계획이다.
자율운항 기술은 국제해사기구(IMO)가 정한 4단계로 분류한다. 1단계는 사람의 보조 역할에 머물고, 2단계에서 처음으로 AI 선장이 원격 제어를 한다. 3단계에서는 사람의 개입이 최소화되고, 최고 수준인 4단계가 되면 사람 없이 완전 자율운항이 가능하다. 아비커스의 AI 선장은 2단계에 해당한다.
김진환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각종 센서를 이용해 주변 상황을 실시간으로 인식·판단하고 항로를 결정하며 배를 움직인다는 관점에서는 자율주행 자동차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며 “대양을 오가며 물류를 운송하는 대형 운반선의 경우 AI가 24시간 감시해 사고를 막을 수 있어 안전상 이점이 크다”고 했다.
○ 여객선 시험한 롤스로이스, 메이플라워호 보낸 IBM
자율운항 선박의 ‘원조’는 수십 년 전 개발된 군용 무인 잠수정, 소형 무인 수상선 등이다. 2012년 미 해군은 소형 쾌속정에 폭발물을 싣고 자살 폭탄 공격을 벌이는 테러리스트 선박에 대응하기 위한 무인 고속정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사람이 조종하던 무인선이 자율운항 선박으로 진화하며 상선에까지 적용된 건 최근 발전한 딥러닝 기술의 공이 컸다. 2018년 롤스로이스는 인텔의 AI 서버를 이용해 라이더, 레이더, 열화상 카메라가 취합한 정보를 하루 1TB(테라바이트)까지 처리하는 지능형인식시스템(IAS)을 적용한 대형 자율운항 선박 개발을 발표했다.
롤스로이스는 핀란드 국영 선박회사인 핀페리와 길이 53.8m의 여객선 ‘팔코’에 IAS를 설치해 승객 80명을 태우고 50km를 왕복하는 데 성공했다. 또 일본 고베와 오이타를 오가는 길이 165m 여객선인 ‘선플라워 골드’도 IAS를 이용해 야간 운항에도 성공했다. 노르웨이의 해운사인 콩스버그는 자국 화학회사의 의뢰를 받아 길이 6.3m, 12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자율운항 컨테이너선을 개발해 올해 상업 운항에 들어갈 예정이다.
AI 자율운항 기술은 산업의 경계도 허물고 있다. IT 기업인 IBM은 올해 초 AI 카메라 6대와 레이더, 음파탐지기를 장착한 ‘메이플라워 자율운항 선박(MAS400)’을 선보여 1620년 신대륙에 첫 이주민을 실어 나른 메이플라워호의 항로를 따라 대서양 횡단에 도전했다. 기계 결함으로 전체 항로 4800km에 훨씬 못 미친 560km까지 운항하는 데 그쳤지만 해수 미세 플라스틱 농도를 측정하고 고래 음향을 녹음하는 등 다양한 연구 활동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 24m급 시험선 띄우고 기술 실증
정부도 자율운항 선박 기술 개발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해양수산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사업 통합사업단을 출범시키고 2025년까지 1600억 원을 투입해 장거리 대양의 경우 3단계, 단거리 연안 항해의 경우 2단계 기술을 확보하기로 했다.
최진 통합사업단 총괄사업관리팀장(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연안은 장애물이 많아서 충돌 위험이 크고, 대양은 장애물이 줄어드는 대신 악천후에 대비해야 한다”며 “고장이 나면 위성통신을 이용해 육상에 영상을 공유하거나 로봇을 이용한 자동 정비 기술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통합사업단은 올해 말 울산 고늘지구 앞바다에 24m급 ‘해상 테스트베드 시험선’을 띄우고 지능항해, 기관 자동화 등 핵심 기술을 실증할 계획이다. 자율운항 선박에 필요한 요소 기술의 실증 절차 표준화를 선점하는 게 목표다. 최 팀장은 “자율운항에 성공해도 현재로선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인증 기준이 없다”며 “올해 시험선을 띄우고 내년에 성능실증센터를 구축해 국제 표준화를 주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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