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한 식감, 시원하고 단 맛을 가진 ‘배’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사랑하는 과일이다. 해마다 명절이면 선물용으로 고급 사과와 배 세트를 찾는 이들이 많다. 배를 먹고 나면, 가운데에 씨와 꼭지가 붙은 단단한 심지가 남는다. 달디 단 배지만, 유독 심지 부분은 신 맛이 나는데다 식감도 딱딱해 먹지 않는다.
모두가 그냥 버리고 마는 배의 심지, 27세 젊은이의 눈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재료로 보였다. 곧바로 연구개발에 착수한 그는 배의 석세포(배의 심지와 과육 안에 들어 있는 까슬까슬한 세포)를 추출해 소재화 및 상품화하는데 성공했다. 루츠랩 김명원 대표의 이야기다.
배의 석세포는 배의 심지 부분에 많이 박힌, 갈색의 작은 알갱이다. 배에서 석세포만 떼내 가공하면 5mm 이하 크기의 마이크로비드(Microbead), 미세 플라스틱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물질이 된다. 용도에 따라 한두 개만 쓰거나 여러 개를 뭉치는 등 크기를 조절 가능한 장점도 가졌다.
미세 플라스틱의 유해성은 널리 알려졌다. 뭔가를 연마할 목적으로 처음부터 작게 만들어진 미세 플라스틱은 알게 모르게 우리 몸에 들어와 여러 악영향을 끼친다. 플라스틱 병, 그물 등이 바람에 풍화되거나 마모돼 만들어진 2차 미세 플라스틱 역시 우리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세계 수많은 연구자가 미세 플라스틱의 유해성을 경고했다. 특히 바다 오염 문제가 심각하다. 생활 쓰레기, 그물 등에서 생긴 미세 플라스틱이 바다를 오염시켜 일으킨 피해액 규모는 연간 130억 달러, 15조 2620억 원에 달한다. 미세 플라스틱을 제거하는 것도 큰 일이지만, 우리 몸에 쌓인 채 배출되지 않아 만드는 건강 악화 문제는 더욱 큰 일이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 몸에 쌓인 미세 플라스틱은 꾸준히 환경 호르몬을 내뿜어 각종 암 발병을 일으킨다. 게다가 자연에서 마모돼 만들어진 2차 미세 플라스틱에는 각종 중금속까지 붙어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산소를 만드는 박테리아에게도 나쁜 영향을 준다.
이에 2000년 이후 세계 각국은 미세 플라스틱 사용을 규제하는 법안을 속속 발의했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연합(EU) 등은 화장품과 세제, 의료 기기와 농업 부문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도록 법률을 개정했다. 우리나라도 2017년부터 미세 플라스틱 사용을 금지했다.
업계는 미세 플라스틱의 성질을 그대로 갖추면서 우리 몸에 무해한 대체 물질을 찾아 나섰다. 이 가운데 2017년,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이 배의 석세포로 미세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이론을 최초로 고안했다. 하지만, 기술 이전에 실패해 이론이 사장될 위기에 빠졌다.
이 기술을 눈여겨본 김명원 대표는 배의 석세포를 추출하는 기술을 연구했다. 까다로운 추출 및 생산 공정을 거듭 실험한 결과, 배의 석세포 및 관련 상품을 양산 가능할 만큼 기술의 수준을 높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만든 배의 석세포는 인체에 무해해 먹어도 될 정도다. 마찰 시 피부 자극도 없다. 반면, 미세플라스틱보다 연마 효과가 오히려 높다. 치아의 치석, 피부의 각질을 제거할 때 탁월하며 모공 축소 효과까지 낸다.
김명원 대표는 우선 배의 석세포로 스크럽(세안제), 샴푸와 폼 클렌징 등 화장품을 만들었다. 인체에 무해하므로 식품 첨가물, 제과류나 반려동물의 사료를 만드는데 쓰는 것도 된다. 연마 성질이 우수해 파운데이션을 비롯한 색조 화장품에 들어가는 미세 플라스틱의 대체 소재로도 주목 받았다.
미세 플라스틱을 완벽하게 대체할 친환경 재료, 배의 석세포 개발 소식을 듣고 세계 유수의 기업이 루츠랩의 문을 두드렸다. 화장품 기업과 약품 기업, 생활용품 기업과 식품 기업이 루츠랩과 MOU(연구개발협약)를 맺고, 기존에 쓰던 미세 플라스틱을 배의 석세포로 대체할 방안을 연구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석세포는 오로지 우리나라의 배에만 있다는 점이다. 서양 배(Pear)에는 아예 석세포가 없다.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한 중국에서는 배가 23종 자라지만, 이 가운데 어떤 배에도 석세포가 없다.
김명원 대표는 그래서 루츠랩이 배의 석세포 추출과 활용 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 자리에 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석세포를 추출할 배의 원물은 우리나라에서 배의 생산지로 가장 유명한 전라남도 나주의 농가로부터 받는다. 원물 자체의 품질도 우수한 셈이다. 기술 이전 경력과 여러 개의 특허,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을 포함한 다양한 파트너와 이미 양산 중인 상품에 이르기까지. 루츠랩은 사업 기초를 튼튼하게 세웠다.
젊은 기업 루츠랩은 이미 또 다른 친환경 소재를 주목한다. 배의 석세포에 이어 이들이 주목한 것은 농수산 부산물 가운데 ‘김장 폐기물’과 ‘전복껍데기’다.
김장 배추김치를 담그고 나면, 배추의 꼭지나 이파리 등 부산물이 남는다. 지금까지는 버려진 이 소재에서 루츠랩은 ‘건강기능식품 소재’를 추출하려 연구 중이다. 이미 상품화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공장 증설 후 본격적으로 이 사업을 펼칠 전망이다. 관련 기업과의 MOU도 맺었다. 전복껍데기를 가공하면 ‘탄산칼슘’을 추출 가능하다. 이 역시 건강기능식품 소재로 유망하다. 물론, 이전처럼 전복껍데기를 비료로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연구한다.
한편으로는 배의 석세포 활용 범위를 고부가가치 산업 ‘반도체’ 부문으로까지 넓힐 계획이다. 연마 성질을 이용해 반도체 식각(화학적 혹은 물리적 처리를 가해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기술)용 첨가물로 쓰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김명원 대표는 루츠랩의 표어를 ‘같이의 가치(The Value of Coexistence)’로 소개했다. 농가와, 소비자와, 다른 기업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들자는 내용이다.
루츠랩은 배의 석세포를 추출할 원물을 전라남도 나주와 광양, 경상남도 진주와 하동 등 우리 농가로부터 받는다. 이 때 배 즙을 추출하고 남은 부산물, 비바람의 피해를 입은 낙과, 성장이 더딘 배나 냉해 피해를 입은 배 등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을 주로 받는다. 루츠랩은 고품질 원물을, 배 농가는 기대하지 않았던 추가 수익을 얻는 셈이다.
소비자에게는 미세 플라스틱을 완전히 대체 가능한 물질을 제공한다. 함께 건강한 삶, 지구를 만들자는 새로운 가치를 알린다. 다양한 기업과 협력해 배의 석세포로 만들 제품의 종류를 늘리고, 환경과 상생하는 생태계를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루츠랩의 사업은 ESG 경영과도 일치한다.
김명원 대표는 “루츠랩은 미세 플라스틱 대체 소재 시장을 이끄는 기업입니다. 나아가 산업계 각 부문에서 나오는 부산물과 폐기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기술을 연구하는 기업이기도 합니다. 사업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 대체 소재로 만든 상품 브랜드의 성공도 이루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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