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기업들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페인 포인트(Pain Point)라는 단어를 많이 듣는다. 사전적으론 통각점이란 뜻이지만, 이 맥락에선 일상이나 업무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불편함을 뜻한다. 곳곳에서 페인 포인트를 발견해 이걸 해결해주는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해 사업화하는 게 흔한 스타트업의 생태다.
택시 잡는 게 불편해서, 느린 배송이 답답해서, 송금이 불편해서 해결책을 찾는다. 그렇게 탄생한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들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아주 사사로운 불편함이라도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그 해결책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이 분명하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반대로 아무리 중대한 문제라도 소수가 겪는 문제라면 외면당하기도 한다.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문제들이다. 숫자가 적다 보니 사업화해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큰 개선 없이 방치되고 있던 분야 중 하나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 장치 분야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시각장애인 인구는 약 2억 5,300만 명이다. 전 세계 인구의 3% 남짓이다. 우리나라만 놓고 보면 지난해 기준 등록장애인 중 시각장애인은 25만 2,324명으로 전체 인구의 0.5% 수준이다. 애플, 구글, 아마존을 뒤잇고 싶어 할 창업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시장은 아닌 셈이다.
‘닷(Dot)’을 창업한 김주윤 대표는 미국 유학 시절 점자 성경책을 접하며 시각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처음 알게 됐다. 활자로는 1권짜리인 성경은 점자로는 20권이 넘는다. 같은 한 권이라도 더 크고, 무겁고 가격도 비싸다. 성경처럼 점자책이 있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에 따르면 지난해 출판된 책 중 점자책 비율은 0.2%에 불과했다. 점자책 자체가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비장애인에게도 책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물건이다. 그래서 가볍고 보관도 편한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이 인기다. 만약 점자로 글이나 그림을 표시해주는 전자책 단말기나 태블릿이 있다면 시각장애인들도 똑같은 이점을 더 크게 누릴 수 있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시각장애인용 보조공학기기들이 있긴 하지만 가격이 비싸고 편의성도 떨어진다. 글이 아닌 사진을 촉각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김주윤 대표는 “제가 경험한 스타트업의 세계는 조그마한 불편함이 있으면 그걸 해결하려고 몇십 명이 달려드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문제를 왜 아무도 안 할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도 처음에는 세상을 뒤흔들 거창한 무언가에만 관심이 있던 창업가였다. 그러나 3번의 창업 실패를 겪은 뒤 창업 동기와 목표를 고민하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김 대표는 돈은 자신에게 동기가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신 소외된 자들을 이롭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가장 저렴한 시각장애인용 보조공학기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 그는 귀국 후 닷을 창업하고 기술자를 끌어모아 기술 개발에 매진했다.
닷이 기술력 없이 그저 좋은 의도만 내세우는 기업이라면 지금처럼 주목받고 성장하는 기업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닷에서 만드는 점자 표시 장치의 핵심 부품은 ‘닷 셀’이라는 액추에이터다. 전자석을 이용해 점자를 표시하는 돌기를 움직이는 원리다. 닷의 ‘닷 셀’은 기존 점자 액추에이터에 비해 크기도 작고 가격도 저렴하다. 해외 기술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김 대표는 “일본이나 독일 기술을 눌렀어요. 훨씬 더 뛰어납니다”라고 자신했다.
이 액추에이터를 활용해 가장 처음 내놓은 소비자용 제품이 바로 세계 최초 점자 스마트워치인 ‘닷 워치’였다. 기존에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사용한 시계는 뚜껑을 열고 시곗바늘을 직접 만져 시간을 확인하는 형태였다. 익숙지 않으면 읽기도 어렵고, 잘못 건드리면 바늘이 돌아가는 일도 흔하다. 1분 1초 단위로 정확하게 시간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도 있지만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시끄러운 곳에선 잘 들리지 않고, 반대로 정숙해야 하는 상황에서 썼다간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점자를 활용한 닷 워치는 이러한 한계를 모두 극복할 수 있다. 시곗바늘 대신 점자 표시 장치가 시간을 알려준다. 스마트폰과 연동해 문자나 각종 알림 메시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음성 알림과 달리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쓸 수 있고 민감한 사생활 관련 내용이 외부로 노출될 염려도 없다.
닷이 시계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건 디지털 촉각 표시 장치다. 닷 셀을 여러 줄로 구성하면 액정 화면 같은 역할을 하는 촉각 표시 장치를 만들 수 있다. 점자뿐만 아니라 그림, 도형도 표현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한 태블릿 제품도 준비하고 있다. 디지털 촉각 표시 장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현재 닷이 주목하고 있는 건 교육 분야다.
그동안 시각장애인들은 크고 무겁고 비싼 점자 교과서로 공부해야 했다. 점자책 자체가 부족하니 다양한 분야 지식을 접할 기회도 부족했다. 점자정보 단말기도 있긴 하지만 글자가 아닌 그림이나 도형은 표시할 수 없어 한계가 있었다. 촉각 표시 장치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면 시각장애인들에게 훨씬 더 폭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직업 선택권도 넓힐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눈여겨본 미국 교육부 산하 특수교육 담당 단체는 닷과 300억 원 규모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 내년부터 4년 동안 닷에서 촉각 표시 장치를 독점 공급하는 내용이다.
기기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점자 콘텐츠 자체가 부족하면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한글 점자는 한국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인 문자 체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번역과 이를 검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각각 점역사, 점역교정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점역사는 약 200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정된 전문 인력에 의존해야 하는 한 생산될 수 있는 점자 콘텐츠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닷은 이를 해결할 방안도 이미 준비했다. 13개국 언어를 점자로 실시간 번역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이다. 글자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도형도 촉각화할 수 있다. 현재 이를 활용해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과 함께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김 대표는 돈을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자선단체가 아닌 이상 기업으로서 수익을 고민하는 건 필연적이다. 닷 워치의 우수성은 일찌감치 인정받았지만 수요가 한정적인 제품이라는 사업적 한계는 남았다. 멋진 디자인에 끌려 제품을 구매한 비장애인 고객도 있지만, 흔치 않은 사례다. 마케팅도 쉽지 않다. 흔히 쓰이는 마케팅 기법은 비장애인을 상정하고 개발된 거라 같은 비용을 써도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는 효과가 크지 않다.
닷은 외연 확장으로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먼저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했다. 국내만 놓고 보면 시장이 작을지 몰라도 범위를 전 세계로 넓히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진다. 닷 셀을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도 고안했다. 근본은 결국 촉각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안마기나 증강현실·가상현실 기술과 접목한 촉각 반응 제품에 활용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활로는 기업과 정부를 대상으로 사업을 펼치는 거다. 바로 배리어 프리 인프라 구축이다. 현재 닷이 주력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길 안내나 식당 주문과 같은 대인 업무를 무인 단말기인 키오스크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지만 장애인은 사용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닷에서 개발한 키오스크는 헬렌 켈러도 사용할 수 있는 키오스크를 지향한다. 촉각 표시 장치를 활용해 점자를 표현하는 건 물론 지도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음성이나 수어를 활용해 문자나 점자를 읽기 어려운 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서 소외된 노인이나 한국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 영유아 동반자도 배려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영유아 동반자가 이용할 때는 눈높이에 맞춰서 키오스크 화면과 점자 표시 장치 높이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식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넘어 이미 모든 취약 계층을 포용하는 기술로 진화를 마쳤다.
벌써 성과도 나오고 있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패럴림픽에서 점자 키오스크를 선보인 걸 시작으로, 앞으로 2년에 걸쳐 부산지하철 전역에 닷에서 만든 키오스크가 설치될 예정이다. 지난해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역에서 시범 설치 사업을 한 게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강남구청이나 남원시청 민원실에도 닷에서 만든 민원 안내용 키오스크가 설치됐다.
사업 초기에만 해도 “장애인이 몇 명이나 온다고 이런 걸 해야 하냐”는 태도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취약 계층을 배려해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강해졌다. 무엇보다도 기업이나 정부 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다. 사회적 기업으로서 닷의 가치도 올랐지만, 닷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기관들도 늘어났다. 이미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세계적 대기업들과 협업도 수면 위아래에서 진행하고 있다.
올해 수십억 원대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 중인 닷은 내년에는 200억 원 매출 달성을 목표로 잡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라고 하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자생력 낮은 기업이라는 인식도 있는 게 사실이다. 닷은 그 인식을 깨려 노력하고 있다. 김주윤 대표는 “앞으로 좋은 사회적 벤처 기업이 많이 나와서 우리나라의 선한 뜻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바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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