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초. 홍종원 세브란스병원 성형외과 교수(49)가 서울 광화문의 서점에서 책을 산 뒤 병원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노을빛이 맑았다. 산에 올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졌다. 홍 교수는 인왕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즉흥적인 산행이 홍 교수에게는 드물지 않다. 수술이나 회의가 취소돼 한두 시간 여유가 생기면 병원 뒤편에 있는 안산에 오른다. 점심시간에도 갑자기 산이 생각나면 얼른 안산에 다녀온다. 수술이 잘 끝나면 기분이 좋아 또 안산에 오른다. 병원 뒤쪽으로 나 있는 안산이 언젠가부터 정겨운 동네 뒷동산처럼 느껴졌다.
홍 교수는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북한산의 산자락 동네에서 보냈다. 학교 소풍의 절반 이상을 북한산에 갔을 정도다. 아버지는 산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 피를 이어받은 것일까. 홍 교수도 어렸을 때부터 산이 좋았단다. 그랬던 산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다시 산을 찾기 시작했고, 지금은 등산 마니아가 됐다.
● “헬스클럽 대신 등산 선택”
40대 언저리에 건강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다 ‘1주일 동안 숨이 찰 정도의 운동을 몇 회 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0회’라고 답하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누군가 “운동도 안 하고 관리도 안 하니 이러다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라고 농담을 했다.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봤다.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등산은 아니었다. 누구나 간다는 헬스클럽에 갔다. 얼마나 다녔을까. TV를 보면서 멍하니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관뒀다. 답답한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깅에 도전했다. 속도감이 좋았다. 자신에게 맞는 운동처럼 여겨졌다. 얼마 후 무릎 연골에 이상이 생겼다. 이후 달리기를 접었다. 그 다음 떠올린 것은 자전거였다. 하지만 선뜻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성형외과가 전공이다 보니 자전거를 타다 얼굴을 다쳐 병원에 온 환자를 수없이 봐왔다. 도저히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어릴 때의 추억을 소환했다. 아무 장비도 필요 없고, 내킬 때 언덕을 걷기만 하면 되는 운동. 바로 등산이었다. 다시 등산을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안산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등산 마니아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2주 1회 등산에서 주 4, 5회 등산으로 늘어”
홍 교수는 평균 1주일에 1회 이상 두경부암 환자의 얼굴 재건 수술을 집도한다. 수술은 대체로 오후 6, 7시경에 시작한다. 보통 3~7시간이 소요된다. 수술이 예정된 날의 오후는 꽤나 더디게 시간이 흘렀고, 덩달아 긴장감도 커졌다.
2019년 가을. 그날도 오후 6시에 수술이 잡혀 있었다. 수술 시간을 기다리다 홍 교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수술하기 전, 짬을 내서 안산에 후딱 다녀오면 어떨까.’
홍 교수는 곧바로 산으로 향했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병원에 돌아오기까지 1시간 반이 걸렸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수술할 때도 그 상쾌함이 이어지는 듯했다. 이후 홍 교수는 ‘틈새 시간’이 생길 때마다 가까운 안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평균 2주에 1회꼴로 산에 갔다. 안산에 올라 보니 가까이로는 인왕산, 멀리로는 북한산이 보였다. 그 산에도 오르고 싶어졌다.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 등산 날짜와 시간 등을 기록했다. 재미가 붙으면서 등산 횟수가 일주일에 3, 4회로 늘었다.
요즘에는 인왕산에 푹 빠져 있다. 새벽 출근길에 인왕산에 올라 일출을 보거나 퇴근할 때 들러 야경을 즐긴다. 평일 낮에 1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는 안산에 간다. 주말에는 가끔 가족과 북한산에도 간다. 산행 횟수가 일주일에 4, 5회로 다시 늘었다.
● ‘생활형 등산’ 추구하다
홍 교수에게는 ‘등산 복장’이 따로 없다. 편하면 된다. 홍 교수는 일상 복장 그대로 산에 가는 걸 선호한다. 자신이 즐기려고 직장 동료나 가족 구성원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한다. 이 때문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등산하거나 퇴근 후에 산에 오른다. 교통 체증 때문에 길거리에 버릴 시간을 산행에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동료와 가족, 그 누구에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단다.
홍 교수는 북한산이나 한라산 등 비교적 고도가 높은 산보다는 언제든 갈 수 있는 낮은 산을 선호한다. 그가 주로 가는 인왕산은 338.2m, 안산은 295.9m다. 또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거나 장대비가 퍼부을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하면 산에 오른다. 홍 교수는 이런 산행 스타일을 ‘생활형 등산’이라 했다.
효과는 꽤 크다. 일단 체력이 좋아졌다. 홍 교수는 일을 하다 늦게 자는 편이었다. 피곤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2년 넘게 등산을 하면서 이런 습관이 바뀌었다. 늦게 잠을 자도 아침에 절로 일찍 눈이 떠졌다. 평소 피로감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체력이 좋아지니 등산 도중 쉬는 횟수도 줄었다. 덕분에 산행 속도가 빨라졌다. 안산 주파 시간은 1시간에서 40분으로, 인왕산 주파 시간은 1시간 반에서 50분으로 줄었다. 홍 교수는 “대체로 산행 속도는 시속 3~4㎞ 정도다. 처음에는 1분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혔는데, 지금은 이야기를 하면서 올라가도 멀쩡하다”며 웃었다.
‘생활형 등산’어떻게?
홍종원 교수가 말하는 ‘생활형 등산’은 어떤 것일까. 몇 가지 원칙이 있단다.
첫째,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언제든, 바로, 대략 1~2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산에 오른다. 홍 교수는 “전국 어디든 주변에 가까운 산이나 구릉이 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고도가 높은 산이 아니라 언제든 갈 수 있는 그런 산을 바로 오르는 게 생활형 등산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둘째, 쉽게 다녀올 수 있기에 산에 오를 때 따로 등산 복장이 필요 없다. 이른바 ‘아웃도어’ 패션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면바지에, 와이셔츠 차림도 상관없다. 신발도 마찬가지. 등산화가 아니어도 편한 신발이면 아무것이나 좋다. 다만 무릎 보호대는 꼭 착용한다.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무릎에 손상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에는 무릎이 가장 먼저 차가워지는 부위 중 하나다. 무릎 보호대를 할 경우 보온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셋째, 급하지 않게 꾸준하게 산에 오른다. 홍 교수는 지나치게 숨이 찰 정도로 속도를 높이지 말라고 했다. 숨이 차오른다는 것을 느끼는 수준까지만 강도를 올리되 꾸준히 걸을 것을 주문했다. 힘들면 쉬어야 한다. 대체로 10분마다 1분씩 쉬는 것이 좋다. 다만 앉아서 쉴 경우 다시 일어나기 힘들 수 있으니 서서 쉴 것을 권했다. 이렇게 해도 운동 효과는 충분하다. 홍 교수는 “평지에서는 달려야 숨이 차고 운동 효과가 나타나지만 산에서는 걷기만 해도 15~20분 이내에 숨이 차오른다”고 말했다.
넷째, 즐기면서 산에 오른다. 홍 교수는 혼자 산에 오른다. 자신만의 패턴으로 산에 오르기 위해서다. 여러 명과 등산할 경우 자신도 모르게 속도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사진 촬영을 즐긴다. 10분마다 쉴 때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계절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좋아서다. 홍 교수는 2004년부터 400여 일 동안 남극 세종기지에서 의무대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시간이 남으면 풍경 사진을 찍었었다. 홍 교수는 “자연을 거닐며 자연 그 자체를 즐기고 사진에 담아 앱에 올리는 일이 너무 즐겁다. 업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데 꽤 효과가 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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