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나이듦’ 펴낸 정희원 노인의학 전문의]
노년의 몸은 여러 질병 혼재 상태… 전체 모른 채 처방땐 위독해질 수도
특정약 처방 빼면 극적 호전 가능… 노화속도 늦추는 비결은 ‘덜어내기’
단순당-정제곡물 줄이는 실천부터… 몸기능 좋아지면 생산인구로 활동
꽃이 피었다 지듯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늙고 죽어가는 게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나이 듦은 환영받지 못하는 대상이다. 이런 가운데 노년내과 전문의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쓴 ‘지속가능한 나이듦’(두리반·사진)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아직 노화와는 거리가 먼 38세. 서울대병원에서 전문의가 된 걸로 모자라 노화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KAIST에서 의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7일 만나본 정 교수는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라며 “나이 듦을 극복 대상이 아닌 내 편, 우리 사회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문사회적 지식은 물론이고 시사 예술까지 관심 영역이 다양하고 해박했다.
○노년의 몸은 복잡계, 콧물약 한 알로 위독해지기도
―노인의학이 왜 필요합니까.
“노인의학은 생물학적 노화의 결과인 노쇠(frailty)와 여러 질병이 혼재된 상태에서 환자에게 맞춤 의료를 제공하는 전문 분야입니다. 노화가 축적되면 몸이 바뀌는데, 사람의 몸이 ‘복잡계’로 변합니다. 각 질환들이 상호작용을 해서 예측불허의 결과를 낳기도 하고 같은 약 처방에도 성인과 다른 반응이 나타나죠. 소아과가 따로 있듯 노인과도 따로 있어야 합니다.”
―다약제 정리를 강조합니다.
“한국 고령자의 73%가 두 가지 이상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고 평균 4.1가지 약을 복용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약이 많을수록 부작용도 늘어납니다.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약을 점검하고 꼭 필요한 약물만 취하도록 하는 것을 ‘약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요. ‘잠재적 노인부적절 약제’ 리스트도 만들었습니다.”
다약제 정리의 중요성은 정 교수의 진료 사례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쉽다.
70대 후반 A 씨는 1년여간 대형병원들을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왔다. 온몸이 떨리고 잘 걷지 못하는 증상 때문에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음식을 먹으면 구토하는 증상이 반복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비교적 건강했던 A 씨는 불과 6개월 만에 거동이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 버렸다.
정 교수는 우선 여러 의료기관을 오가며 두꺼워진 A 씨의 의무기록들을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움직임과 떨림으로 도파민 부족을 완화시키는 약을 처방받았던 A 씨의 구토 증상이 심해졌고, 내과에서는 위장약 처방이 하나둘 늘어갔다.
○‘약을 정리한다’
그간의 처방약 목록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선명해졌다. 시작은 진통소염제 한 알이었다. 약사가 함께 처방했던 소화제에 도파민 뉴런 기능을 떨어뜨리는 특성이 있었다. 일반인에게는 별 영향이 없지만 노쇠가 진행된 A 씨에게는 달랐다. A 씨가 떨리는 증상에 대해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파킨슨병 약의 부작용도 구역과 구토였다. 내과 의사는 소화제를 늘려갔다. A 씨가 구토 증상으로 내과 의사를 찾고 떨림에 대해서는 신경과 의사를 찾았으니 치료약들이 뱅글뱅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이를 전문용어로 ‘처방연쇄’라고 한다.
정 교수는 ‘꼬인 이어폰 줄을 푸는 심정으로’ 10가지가 넘는 약 중 소화제와 소염제, 파킨슨병 약을 포함해 3분의 2 정도를 정리했다. 그로부터 2주 뒤, A 씨는 지팡이 없이 진료실에 걸어 들어와서는 ‘반 년 만에 밥을 먹었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약을 정리한 덕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
정 교수는 이런 문제가 생긴 이유로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들었다.
“한국은 환자가 곧바로 전문의와 만나는 시스템입니다. 여러 질병을 가진 노인의 경우 그만큼 여러 의사를 만나야 하고 그들이 각기 약을 처방합니다. 아무도 환자의 전체적인 질병과 처방 상황을 모르는 거죠. 노인의학은 개인별 맞춤치료가 돼야 합니다.”
문제는 A 씨 같은 환자를 치료하면 할수록 병원 입장에서는 손해가 난다는 점이다. 환자의 이모저모를 다 챙기다 보면 환자당 진찰시간이 30분을 넘긴다. 한국에서 노인과를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은 이유다. 2003년 분당서울대병원이 급성기 노인의료 시스템을 도입했고 2009년 서울아산병원이 노인내과를 신설했다. 이후 신촌세브란스, 전남대병원 등 몇 군데 더 생겼지만 병원 내에서 주류 진료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공의료가 발달한 영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노인병학을 중시해 현재 내과의의 10%가 노년내과 간판을 걸고 진료한다. 과별 진료보다 노인병 전담이 있는 쪽이 효율적이고 재정을 줄인다는 것을 영국 정부가 일찍 간파했기 때문이다.
○노년내과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노년내과에서는 다른 진료과 컨설팅을 통해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노쇠가 진행된 환자의 경우 진료과에서 문제 해결이 잘 안 되면 저희에게 문의가 옵니다. 오늘도 재활의학과에서 의뢰가 있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노인인데, 차트를 보니 노인에게 절대 쓰면 안 되는 항콜린성 약을 쓰고 있었어요. 그 약을 끊게 했는데 3일이 지나면 깨어나신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가 노년내과를 지망하게 된 계기도 수련의 시절 응급실에 실려 온 노인 환자에 대해 선배 의사가 특정약을 처방에서 뺀 것만으로 며칠 만에 멀쩡해지는 모습을 본 것이 계기였다.
“속도가 빠르고 효과가 드라마틱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지요. 노인 환자들은 아주 사소한 요소로도 상태가 나빠져요. 의식 떨어뜨리는 약 하나를 잘못 쓰면 못 먹고 못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금방 와상 상태가 되고, 그럼 또 욕창이 생기고…. 생명이 위독해지는 데까지 일주일이면 될 겁니다. 반대로 그 직전에 원인을 찾아내 제대로 해결해놓으면, 깨어나서 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3개월 내에 평소대로 회복되는 선순환 사이클도 만들 수 있지요. 힘들고 돈이 안 돼도 노인의학이 재미있고 보람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죠.”
―그런 보람의 순간이 자주 있나요.
“거의 매일 있어요. 이게 지적인 쾌감을 줍니다. 환자가 어려움을 겪는 꼬인 곳을 ‘탁’ 풀어내면 환자가 ‘뿅’ 좋아져서 며칠 뒤 외래에 걸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하. 그런 환자들일수록 굉장히 고마워하시기 때문에 저도 버텨 나갈 힘이 되지요.”
○노화 지연의 비결은 더하기보다 덜어내기
―노쇠를 늦추고 싶은 중장년층에게 조언을 주신다면….
“노화 속도를 줄이는 건 대개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겁니다. 먹는 것, 번뇌, 스트레스, 영양제를 줄여야 내 몸에 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 대신 채워야 할 것은 잠, 운동, 섬유질 채소, 머리 비우는 시간이죠. 이것들은 노화와 동반되는 만성염증이나 대사 이상과 연관이 있고, 가속 노화와 악순환을 거꾸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모두가 절식을 말하지만 실천이 쉽지 않습니다.
“시작은 간단합니다. 단순당과 정제곡물만 줄이면 됩니다. 이 상태를 몸이 경험하게 하는 거죠. 단순당과 정제곡물로 식사를 하면 체내에 당도가 쭉 올라갔다 내려가면서 코르티솔이 나와 다시 식욕을 당깁니다. 그런 악순환이 사라지면 칼로리 섭취는 무조건 줄어듭니다. 환자들에게 설명해드리면 쉽게들 실천하세요. 한두 달이면 효과가 나타나고 6개월마다 약 하나씩 끊을 수 있어요.” ―지속가능한 사회시스템은….
“노년내과 기준으로 보자면 한국인은 77세까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맞춰 사회보장도 서구 선진국처럼 뒤로 늦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도 노인의학이 제대로 기능해야 합니다. 더 건강한 노인이 많아지면 이분들이 부양 대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해 생산인구로 기능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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