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집에서 가까워 서울 남산을 자주 올랐어요. 남산에서 SFR(Seoul Fun Run) 마라톤클럽 회원들이 달리는 것을 자주 접했어요. 어느 날 우연히 회원을 만나 인사를 나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남산을 올랐어요. 저도 혼자 가끔 달렸는데 자주 다쳤어요. 그 때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달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좋은 인연이 돼 지금까지 잘 달리고 있습니다.”
우연한 인연이 사람의 인생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정진선 씨(39)는 2018년 9월 서울 남산을 오르다 SFR 회원을 만나면서 마라톤에 빠지게 됐다. 운동의 일상화를 실천하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
“역시 함께 하니 좋았어요. 동호회 감독과 선배들에게 바르게 달리기 법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니 다치지 않았죠.”
하지만 2019년 3월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42.195km 풀코스를 처음 완주한 뒤 고관절을 다쳐 6개월을 쉬어야 했다. 풀코스 달리기 전에 30km 이상 달리는 LSD(Long Slow Distance) 훈련을 해야 하는데 25km까지만 소화한 뒤 달린 게 화근이었다. 29km를 넘어서면서 고관절에 통증이 와 질질 끌다시피 달려 4시간45분에 완주했다. 결과론적으로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지면서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완주한 공식 풀코스 레이스가 됐다.
쉬면서 여기저기 달리기 정보를 수집했고 그해 10월 철인3종까지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오픈케어를 찾아 선수출신 함연식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 달리기 자세를 다시 배웠고 서서 다리 들어올리기와 플랭크, 복근운동 등 보강훈련까지 하니 몸이 달라졌다.
“풀코스를 완주하게 도와주는 100일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두 번 받았어요. 지난해 10월 풀코스 완주를 준비했는데 대회가 열리지 않아 400m 트랙에서 풀코스를 완주했습니다. 3시간45분을 목표로 달렸는데 3시간39분대에 들어왔어요. 그러고도 힘이 남았죠.”
코로나19가 사라지지 않으면서 산을 달리게 됐다. 지난해 11월부터 남산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달리는 트레일러닝 동호회 ‘찰스런’에 가입해 달리고 있다. 산을 좋아했지만 오를 기회가 없던 그에게 트레일러닝은 색다른 묘미를 줬다. “풍광도 좋고 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더 편안하다”고 했다. 도로는 계속 같은 자세로 달리기 때문에 지루하고 같은 근육만 써 피로감이 빨리 오는데 산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니 재미도 있고 덜 피곤하다는 설명이다. 정 씨는 지난달 20일 경기 하남 미사리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달리는 전국마라톤협회 주최 마라톤 풀코스 이벤트 경기에서 3시간50분에 완주해 여자 30대 2위를 했다. 그는 “비도 오고 맞바람이 심해 고생했지만 결과가 좋아 기뻤다”고 했다.
코로나19 시대 ‘언택트 런 크루 갱런(gangrun)’과의 인연으로 런트립(Run Trip)‘의 재미에도 빠졌다. 런 크루 갱런의 회원은 기수제로 운영되는데 각 기수마다 끈끈함이 남달라 서로의 지역으로 갈 경우 챙겨주는 런문화에 더욱 달리기를 사랑하게 됐다. 예를 들어 제주도 여행을 갈 경우 그 소식을 접하면 그 지역 회원들이 함께 달리고 맛 집도 소개해주고 한다는 것이다.
정 씨의 하루는 달리기로 시작한다. 마포에서 둘째 언니와 ’카페키노겐‘을 운영하는 그는 매일 새벽 이태원 집에서 카페까지 5km를 달려서 출근한다. 오후 퇴근 땐 한강변을 달려 귀가하는데 10km 정도 된다. 거의 매일 15km를 달린다. 목요일엔 찰스런, 일요일엔 SFR에서 달린다. 토요일엔 친구들과 산을 찾는다. 주 7일 운동하고 있는 셈이다.
“운동의 일상화라고 할까요. 운동 시간을 따로 내기보다는 일상생활을 운동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이나 시간이 비슷해요. 도로가 막히면 짜증나는데 달리면 전혀 막힐 일이 없어 좋아요. 심신 건강에 아주 좋아요. 카페에 손님이 없을 땐 서서 발 들어올리기도 하고 플랭크나 복근운동도 하죠.”
서서 발 들어올리기는 하루 1000개를 넘게 하고 있다. 달리면서 자신감도 얻었고, 일처리도 깔끔해졌다고 했다.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목표를 세우고 이뤄내는 일이 많아졌어요. 훈련을 분단위 초단위로 쪼개서 하다보니 시간관념도 좋아졌어요. 과거엔 약속에 늦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제가 늦는 것을 용납을 못해요.”
달리면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다. 미용사 자격증이 있는 그는 조만간 더 맛있는 빵을 굽기 위해 제빵사 자격증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지난해까지 미용실에서 일하다 1년 전부터 카페에서 언니와 함께 빵을 구웠는데 내 성격하고 잘 맞았다. 내가 좋아하는 빵을 믿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내면 손님들 반응도 좋았다. 그래서 제빵사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했다. 달리면서 뭐든 하면 될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마포 한적한 곳에 있는 카페키노겐을 러너들의 쉼터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5km를 달렸다는 ’러너인증‘을 하면 아메리카노 커피를 30% 할인해줄 계획이다.
달리면서 성격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지난해 좀 힘든 일이 있었다. 달리면서 잊었다. 달리면서 어차피 일어난 일이 없던 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달리지 않았다면 우울증에 걸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달리니 아무리 먹어도 체중에 변화가 없다. 달리기 전에 비해 근육량이 3% 증가하고 체지방이 9% 빠졌다.
정 씨는 지난해에만 제주도를 6번 다녀올 정도로 ’제주 사랑‘에 빠졌다. 가족과 친구와 한라산도 올랐고 제주도 둘렛길을 돌기도 했다.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돌았고, 달려서도 돌았다. 그는 “제주도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갈 때마다 새로웠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면서 돌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달에도 제주도를 다녀왔다.
최근엔 지인들과 함께 서울 5산 81km를 1박2일 22시간에 종주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나루를 출발해 남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청계산, 관악산을 완주했다. 토요일 오전 11시에 출발해 다음날 오전 10시에 완주했다. 5월 말엔 60km 산악 질주를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매일 달리고 돌아다니는데 남편은 뭐라고 안할까?
“사실 남편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2019년 풀코스 처음 달릴 때 남편이 오토바이 타고 따라 왔는데 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나 봐요. 그 때부터 제가 어디 가서 달리든 응원해줍니다.”
정 씨는 요즘 ’달리기 전도사‘로 불린다. 큰 언니와 딸(조카), 둘째 언니까지 달리기에 입문시켰다. 큰 언니와 조카는 SFN에서 함께 달린다. 6월 열리는 하이원리조트 스카이레이스 때 남편과 함께 20km를 달릴 예정이다. 둘째 언니와 조카도 함께 달린다. 올해부턴 SFN 훈련부장을 맡아 초보자들에게 달리는 법을 지도하고 있다.
“4월 17일 열린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 언택트 버추얼 레이스에서 언니들과 조카 10km 페이스메이커를 했어요. 아주 뿌듯했습니다. 달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평생 사람들이 잘 달리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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