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에서 과학으로 재편되는 정신질환 진단기준[정신건강 대전환기, 우리 사회의 길을 묻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4일 13시 53분


〈4회〉

이태영 양산부산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태영 양산부산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장기간 기침이 계속되면 우리는 흔히 감기가 왜 이리 오래가나 걱정하곤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 기침과 감기는 한 쌍처럼 같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성 기침의 흔한 원인은 감기가 아니라 후비루 증후군, 기관지 천식, 위식도역류 등이다. 기침을 계속하니 감기약을 먹을 것이 아니라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을 확인하고 이를 치료해야 비로소 증상이 완화되는 것이다. 증상과 질병을 혼동하는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조현병은 망상이나 환청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질환이라고 정의하곤 한다. 하지만 망상이나 환청을 유발하는 질환은 이외에도 많다. 조울증이나 우울증이 심한 경우 망상과 환청 같은 정신증을 유발할 수 있고, 치매나 섬망, 약물중독의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뇌전증이나 뇌종양 같은 신경계 질환, 매독이나 갑상선 이상 같은 질환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증상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망상이나 환청이 있다고 조현병으로 진단하면 해당 증상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질환을 놓칠 수 있다. 예를 들어 클로이 모레츠가 주연한 영화 ‘브레인 온 파이어’를 보자. 뉴욕의 저널리스트였던 수잔나 칼라한의 실제 사례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대뇌 특정 부위에 발생한 자가면역질환이 망상과 환청을 유발한다고 해서 조현병으로 오진된 사례를 다루고 있다. 특정 증상을 발생하게 하는 질병이 무엇인지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만으로 진단해 벌어진 오해인 셈이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질병의 진단을 위해 다양한 신체적 검진을 실시하지만 아밀로이드 양전자단층촬영(PET)을 촬영해 알츠하이머병 진단의 도움을 받는 등 일부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진단은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과 징후 그리고 임상 경과에 많이 의존한다.

병원에서 실시하는 혈액, 뇌파 그리고 자기공명영상(MRI) 같은 검사들은 주로 정신 증상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신체적 질환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된다. 예를 들어 조울증인 줄 알았는데 혈액검사나 뇌척수액 검사를 통해 신경매독으로 밝혀지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럼 정신질환을 환자나 보호자가 보고하는 증상의 변화 외 여러 가지 검진을 통해 객관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가끔 뉴스에선 모 연구팀이 특정 정신질환의 원인 유전자를 찾았다거나 치료 물질을 발견했다는 식의 소식이 나오곤 한다. 그런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정신질환 정복이 머지않은 것만 같다. 그런데 왜 아직도 많은 환자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것일까.

현재 정신의학에서는 ‘ICD’나 ‘DSM’ 등의 진단기준을 널리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환자들의 증상과 징후를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우울증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정 증상들이 있어야 하고, 그 강도나 기간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식이다.

특정 정신질환의 원인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결국 이런 진단기준을 만족하는 환자들의 병태생리학적 특징을 찾아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가 조현병 또는 우울증이라고 진단한 환자들이 모두 정확하게 같은 특성을 가지게 될까. 예를 들어 우울증으로 진단받은 환자들이 사실은 서로 다른 병리학적 기전을 가진 다른 질병의 환자들임에도 단순히 우울 증상을 보인다는 이유로 같은 질환으로 진단받는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실제 이런 일이 최근 밝혀졌다. 여태껏 조현병은 대뇌 선조체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과잉 분비되거나, 대뇌피질로 향하는 도파민 회로에 결함이 생기는 질환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기존의 항정신병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조현병 환자들은 애당초 도파민 과잉 분비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깐 우리는 여태껏 도파민 과잉 분비가 조현병의 특징이고 도파민을 차단해줌으로써 정신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일부 환자는 도파민 분비에 이상이 없었고 치료 반응도 없었던 것이다. 의학적으로 두 경우는 서로 다른 질환으로 보아야 마땅할 텐데 여태껏 우리는 두 경우를 조현병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질병으로 취급해왔다. 알고 보면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이런 사례들이 정신질환 내에서 무수히 많을지도 모른다.

2007년 미국의 국립정신보건원은 ‘RDoC(Research Domain Criteria)’ 라는 개념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증상과 징후라는 현상학적 표현형에 기반한 기존의 진단 체계를 탈피하여 생물학적 특성을 중심으로 질환을 재분류하자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초발 조현병 환자에서 대뇌 시상-전운동피질 사이의 연결 회로에 과잉 활성이 보인다면, 이러한 회로의 이상을 통해서 조현병을 진단하자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 인구집단에서 해당 연결 회로에 과잉 활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서 그렇지 않은 이들과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들 중에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도, 성격이 이상한 사람도, 건강한 일반인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해당 회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쇄해주는 또 다른 회로의 영향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신경회로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치료한다면 환자마다 서로 다른 특성에 대해 맞춤형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신질환의 접근방식과는 전혀 다른 혁명적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RDoC가 정신의학의 미래라는 점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바로 규모의 문제다. 이런 연구는 단일 대학이나 병원에서 수백 명 단위의 환자를 모집해선 수행하기 어렵다. 국가 차원에서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 단위의 빅데이터를 모아야만 풀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RDoC 개념이 발표된 지 이미 1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직 큰 발전이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만일 대한민국에서 세계를 선도할 기술을 개발하려면 개인의 연구자가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이러한 국가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행해야 한다. 현재 한국 인구의 4분의 1이 일생에 한 번쯤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시야를 아주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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