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신의학은 질병 진단을 위해 다양한 신체 검진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과 징후 그리고 임상 경과에 많이 의존한다. 즉 우울증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특정 증상이 있어야 하고, 그 강도나 기간은 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기준이다.
특정 정신질환의 원인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진단 기준을 만족하는 환자들의 병태생리학적 특징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예를 들어 그동안 조현병은 증상과 징후로 진단할 경우 병태생리학적인 특징으로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과잉 분비되거나 대뇌피질로 향하는 도파민 회로의 결함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기존 항정신병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조현병 환자들은 애당초 도파민 과잉 분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의학적으로 두 경우는 서로 다른 질환으로 보아야 마땅할 텐데, 여태껏 우리는 두 가지 모두 조현병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질병으로 취급해 왔다. 알고 보면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이런 사례들이 정신질환 내에서 무수히 많을지 모른다.
2007년에 미국의 국립정신보건원은 ‘RDoC’(Research Domain Criteria)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이것은 증상과 징후라는 현상학적 표현형에 기반한 기존의 진단 체계에서 벗어나 생물학적 특성을 중심으로 질환을 재분류하는 개념이다.
기존에는 특정 환자가 대뇌 여러 부위의 연결 회로에 과잉 활성을 보이면 이러한 회로의 이상을 통해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RDoC는 전체 인구집단에서 해당 연결 회로에 과잉 활성이 있는 사람을 모두 찾아 그렇지 않은 이들과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되면 그 가운데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 성격이 이상한 사람, 그리고 건강한 일반인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해당 회로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쇄해주는 또 다른 회로의 영향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신경회로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치료하면 환자마다 서로 다른 특성에 대해 맞춤형 치료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정신질환 접근방식과는 전혀 다른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다.
이처럼 RDoC가 정신의학의 미래라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장벽 중 하나가 바로 규모의 문제다. 국가 차원에서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 단위의 빅데이터를 모아야만 풀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세계를 선도할 기술을 개발하려면 연구자 개인이 시도할 수 없는 이러한 국가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행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이 일생에 한 번쯤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야를 아주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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