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냐 정체냐...중대 기로에 선 韓 리걸테크

  • 동아닷컴
  • 입력 2022년 5월 18일 14시 27분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얼마나 법률서비스를 활용하고 있을까. 예컨대 주차 위반 딱지를 끊었을 때 그 처분이 합당한지 따지기 위해 변호사에 자문을 구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열에 아홉은 값비싼 수임료를 떠올리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기 때문이다.

실제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리걸테크산업협의회가 최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2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3.5%는 ‘아는 변호사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응답했다.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법률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변호사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냐는 질문에도 ‘전혀 그렇지 않다’(25.7%)와 ‘그렇지 않다’(26.8%)는 응답이 52.5%에 달했다. 이처럼 일상과 동떨어진 법률서비스를 생활 속에서 활용하도록 돕겠다는 기술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리걸테크(LegalTech) 기업이다. 이들은 근로계약서 위험조항 분석기와 온라인 변호사 광고 플랫폼, 고소장 자동 작성 서비스 등을 선보이며 법률서비스 문턱을 낮추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변호사들의 반발과 각종 규제로 성장이냐 정체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출처=셔터스톡
출처=셔터스톡

美, 英 등 주차위반 처분 이의제기, 형량 판단까지 리걸테크 활용

리걸테크는 법률(legal)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법률적인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 등장한 서비스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용어이지만,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일상 속 깊숙이 스며든 기술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주차 위반 딱지를 끊었을 때 처분이 합당한지를 따져보기 위해 미국, 영국인들은 ‘두낫페이(DoNotPay)’라는 리걸테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두낫페이는 챗봇 형식의 법률 질의응답 시스템이다. 주차위반 처분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주차 당시 상황을 챗봇에 입력하면, 위반 여부를 판단해주는 서비스다. 주차 공간이 충분했는지, 관련 표지판이 있었는지, 안내는 충분했는지 등을 인공지능 변호사가 묻고 관련 법률을 검토해 이의제기할 경우 승산이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의 절차를 진행하고자 한다면, 주차위반 처분에 대한 철회요청서 작성까지 돕는다. 24시간 상담이 가능하고, 답변을 듣기까지 30초 내외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유용하다. 서비스 이용료까지 무료인 두낫페이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2015년 말, 서비스를 출시한 지 1년 만에 사용자 25만명을 돌파했다. 이 중 16만명의 주차위반 딱지를 철회해 400만 달러의 범칙금을 회수하기도 했다.

두낫페이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생 조슈아 브라우더가 19세 때 만들었다. 당시 주차위반 고지서를 받은 그가 변호사를 통해 이의제기하다가, 막대한 비용과 시간에 부딪혀 포기한 경험을 바탕으로 법률서비스의 비효율을 개선하고자 두낫페이를 고안했다.
두낫페이 서비스 이미지. 출처=두낫페이 홈페이지
두낫페이 서비스 이미지. 출처=두낫페이 홈페이지

미국에서는 리걸테크 기술이 재판에 관여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두고 나온 판례까지 있다. 이른바 ‘루미스 사건’이다. 2013년 미국 위스콘신주에 살던 에릭 루미스는 총격 사건에 쓰인 차량을 몰다가 경찰 검문에 불응하고 도주한 혐의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판사가 형량을 판단할 때, 리걸테크 스타트업 노스포인트가 만든 ‘컴퍼스’라는 형량 판단기의 도움을 받았다. 컴퍼스는 범죄자 성향과 생활 방식, 범죄 전력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재범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루미스는 인공지능인 컴퍼스가 어떤 알고리즘으로 형량을 제시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며 판결에 대한 항소를 제기했지만, 2017년 위스콘신주 법원은 항소를 기각했다. 컴퍼스가 형량을 판단할 때 도움을 줬을 뿐, 최종 판결은 전문 법조인인 판사가 했다고 본 것이다.

이웃 나라인 중국도 리걸테크 기술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충칭에 위치한 서남정법대에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법학원을 설립해 전문 인재를 길러내는가 하면, 중국 하이난 고등인민법원 형사 법정은 AI 양형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출처=셔터스톡
출처=셔터스톡

개화기 맞은 韓 리걸테크…변호사들 반발에 ‘멈칫’

한국 리걸테크 시장은 미국과 영국에 비하면 기술적으로 부족하지만, 초기 형성기를 지나 개화기를 맞이하고 있다.

2019년에는 인간과 AI의 역사적인 첫 법률 자문 대결, ‘알파로 경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인간 변호사 2인 1조로 구성된 ‘변호사팀’과 AI의 자문을 받는 변호사로 구성된 ‘혼합팀’이 각각 최저임금법이나 기간제법, 미성년자나 파견근로자 보호법 등 근로계약과 관련된 법률 자문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하는지를 두고 대결을 펼쳤다.

각 팀의 답안지를 전달받은 심사위원단 3인은 정량평가와 정성평가 방식으로 심사했다. 그 결과 AI의 판례 추천과 법률 검색 서비스를 활용한 혼합팀이 압승을 거뒀다.

2020년에는 20여개 리걸테크 스타트업이 모여 이익단체인 ‘리걸테크산업협의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이들은 법률서비스의 접근성과 생산성 혁신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데 합의하고, 기술발전과 관련 제도 개선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처럼 개화기를 맞은 국내 리걸테크 기업들은 판례와 관련 법령을 빠르게 찾아주는 지능형 검색기와 근로계약서의 위험 조항을 찾아주는 분석기(인텔리콘연구소), 고소장을 자동으로 작성해주는 리걸테크 서비스(리걸인사이트), 온라인 변호사 광고 서비스(로앤컴퍼니) 등을 선보이며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텔리콘연구소의 근로계약서 위험 조항 분석기가 취약점과 관련 법령, 판례를 제시하는 모습. 출처=인텔리콘연구소
인텔리콘연구소의 근로계약서 위험 조항 분석기가 취약점과 관련 법령, 판례를 제시하는 모습. 출처=인텔리콘연구소

이들 기업은 기존 변호사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기술이 아닌 변호사의 도우미로 리걸테크 기술을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변호사가 7일이 걸려 찾아야 할 방대한 양의 법률 문서와 판례 등을 인공지능을 활용해 7초 만에 찾도록 도와 법조인의 빠른 판단을 돕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 변호사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일자리의 위협을 느낀 법조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대표적인 사례로 온라인 변호사 광고 서비스 '로톡'을 운영하는 로앤컴퍼니와 법조계의 갈등을 꼽을 수 있다.

로톡의 서비스 광고 이미지. 출처=로앤컴퍼니 홈페이지
로톡의 서비스 광고 이미지. 출처=로앤컴퍼니 홈페이지

로앤컴퍼니가 2014년 출시한 로톡 서비스는 일정 광고료를 변호사들에게 받은 후 법률 자문을 구하는 소비자가 볼 수 있도록 변호사 목록과 광고를 실어주는 변호사 광고 플랫폼이다.

직역수호변호사단을 비롯한 변호사단체는 해당 서비스가 광고료를 지불한 변호사를 소개, 알선하고 변호사가 아님에도 법률사무를 취급했기 때문에 변호사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판례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개인정보도 침해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변호사법 위반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로앤컴퍼니를 고발했다.

해당 사건은 지난해 초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서울경찰청 반부패, 공공범죄수사대에 이첩된 후 같은 해 12월 불송치 결정이 났지만, 고발단체는 지난 2월 경찰의 결정에 이의신청했다. 이후 지난 11일, 검찰은 로톡이 광고료 외 법률상담과 관련한 수임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를 소개, 알선한다고 볼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부정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판례를 수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처분으로 긴 시간 끌어온 리걸테크 업계와 법조계의 갈등이 마무리되리라는 기대감이 나오지만, 직역수호변호사단 소속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유감을 표시하며 반발해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저 멀리 앞서가는 리걸테크 선진국…”골든타임 놓칠까 우려”


리걸테크 업계에서는 이미 저 멀리 앞서가는 리걸테크 선진국을 따라잡을 골든타임을 놓칠까 우려한다. 한시가 급한데 각종 규제와 갈등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임영익 인텔리콘연구소 대표 변호사는 “리걸테크 도입이 비교적 늦었던 일본이나 동남아의 경우, 변호사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유니콘 기업이 탄생하는 등 급격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며 “국내의 경우 최근 리걸테크 스타트업이 많이 생겨났지만, 변호사업계의 반발과 규제 문제로 성장이 정체되면서 국제적 경쟁력과 미래 발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다”고 우려했다.

임 대표는 이어 "미국도 오래전 리걸테크가 막 탄생할 무렵, 변호사 단체에서 고소, 고발을 연발했고 일부 변호사들은 새로운 산업 탄생에 매우 적대적이었다”며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규제와 반발이 리걸테크 산업을 성장시킨 원동력이 됐다. 고소, 고발 이슈가 언론에 계속 노출되면서 모든 시민과 변호사가 리걸테크의 유익함에 눈을 떴기 때문인데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닷컴 IT전문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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