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생명공학기업 카리부 바이오사이언스가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로 면역세포의 유전자를 교정해 암세포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은 생명 정보를 담은 DNA 염기를 잘랐다 붙이는 유전자 편집 기술 중 3세대 기술로 분류된다. 이 회사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개발해 20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제니퍼 다우드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가 이끌고 있다.
다우드나 교수와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교수가 스위스에 설립한 생명공학기업 크리스퍼 테라퓨틱스도 혈중 산소량이 부족해 생기는 유전질환인 겸상 적혈구 빈혈 환자 31명을 대상으로 크리스퍼를 활용한 치료법의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고무적인 성과를 얻었다고 최근 밝혔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실제 임상에서 잇따라 성과를 내면서 인간의 난치병 극복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 지금까지 없던 치료법이 나온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크리스퍼로 불리는 리보핵산(RNA)과 효소 단백질을 이용해 동식물의 유전정보가 담긴 DNA에서 특정 부위를 정확히 찾아 잘라내는 기술이다. 10년 전 다우드나 교수가 주도한 국제연구팀이 박테리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질병 치료법이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다.
지난달 12일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개한 임상시험 결과는 미국 보스턴 소재 생명공학기업 버텍스와 공동으로 진행했다. 빈혈을 일으키는 유전질환인 겸상 적혈구 빈혈과 베타 지중해 빈혈 환자 75명을 대상으로 크리스퍼 치료법을 활용한 임상시험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진은 태아일 때만 활성화되고 출생 후 몇 개월 내 기능을 멈추는 ‘태아 헤모글로빈’에 주목했다. 임상시험 지원 환자의 골수에서 미성숙한 혈액세포를 추출한 뒤 크리스퍼 기술을 이용해 태아 헤모글로빈 유전자 작동을 멈추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부위를 잘라냈다. 이렇게 유전자 교정된 혈액세포를 환자에게 다시 주입해 손상되지 않은 헤모글로빈이 풍부한 적혈구를 생성할 수 있도록 했다.
임상 결과 베타 지중해 빈혈로 치료받는 44명의 환자 중 42명이 수혈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호전됐고 31명의 겸상 적혈구 빈혈 환자 중 혈중 산소량 감소를 호소하는 환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회사는 올해 안에 규제당국에 치료법 승인을 요청할 계획이다. 영국 소재 바이오벤처 인텔리아 테라퓨틱스는 미국 생명공학 기업 리제네론과 협력해 손상된 간 단백질이 혈액에 쌓이면서 생기는 희귀 유전질환인 아밀로이드증을 크리스퍼를 이용해 치료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유전자 교정 작물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케이시 마틴 영국 존인스센터 교수 연구팀은 국제공동연구를 통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로 프로비타민D3가 함유된 토마토를 개발하고 올해 5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식물’에 발표했다. 영국 스타트업 이나리 애그리컬처는 크리스퍼를 이용해 물과 비료를 덜 사용하는 대두와 작물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정부는 크리스퍼를 이용한 유전자 교정 농작물을 유전자 변형 농작물(GMO)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유전자 교정 농작물은 다른 종의 유전자를 삽입해 원하는 형질을 얻는 GMO와는 다른 기술이라는 판단에서다. 통과할 경우 비타민D가 다량 함유된 유전자 교정 토마토가 식탁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 특허 분쟁·생명윤리 논란도 관심
‘세기의 특허 전쟁’으로 불리는 특허 분쟁도 관심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가 공동으로 설립한 브로드연구소가 다우드나 교수가 속한 UC버클리보다 유리한 판정이 잇따라 나오고 있는 가운데 내년 상반기로 예상되는 특허 항소심 결과에 관심이 모인다.
2018년 허젠쿠이 전 중국 난팡과학기술대 교수가 크리스퍼를 인간 배아에 적용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유발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면역을 지닌 유전자 교정 아기를 태어나게 해 과학계를 놀라게 하면서 생명윤리 논란도 뜨겁다. 과학자들은 “결국 크리스퍼로 키를 크게 하거나 눈동자 색깔을 바꾸고 지능을 높이는 배아 교정이 허용될 수 있는지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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