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경기도 고양 농협대 잔디구장에서 열린 60,70대 실버축구단 로얄 FC와 서울 강북구팀의 친선경기. 로얄 FC 선수들 사이에서 “진국이형에게 패스해”란 소리가 자주 나왔다. 1970년대 중반 한국축구의 대표 공격수였던 김진국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71)를 부르는 소리다. 김 전 전무는 이날 공격형 미드필더로 경기를 조율했다. 70세를 뛰어 넘은 그는 매주 토요일 로얄 FC에서 공을 차며 ‘9988 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3일 앓다 죽는다)’라는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김 전 전무는 현역 시절 키가 작아 ‘짤만이’로 불렸지만 뛰어난 발재간과 페인트 기술로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60, 70대 실버축구계에서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공격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전 한때 이름을 날리던 선수들이 나이 들어 빌빌거리는 게 보기 좋지 않았어요. 그래 선수를 은퇴하고 지도자 할 때, 은행에서 근무할 때도 계속 축구를 했어요. 김진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나이 들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전 전무는 1972년부터 1977년까지 6년 동안 A매치(국가대표경기) 97경기에서 27골을 터뜨린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1975년 3월부터 1977년 2월까지 A매치 42경기에 연속 출전할 정도로 강한 체력을 과시했다. 당시 김진국이 센터링(크로스)을 올리면 ‘꺽다리’ 김재한이 헤딩슛으로 골을 잡아내 둘은 ‘환상의 콤비’로 불렸다. 김 전 전무는 “당시 내 센터링은 김재한용‘이라고 불렸다”며 웃었다. 김재한 전 KFA 부회장(75)도 한 때 로얄 FC에서 김 전 전무와 공을 함께 차기도 했다. 김 전 전무는 지금도 25분씩 진행하는 친선경기에서 4,5경기를 거뜬히 소화하고 있다. 그는 “주변서 미련하다 할 정도로 많이 뛴다. 하지만 이렇게 격렬하게 축구를 해야 온갖 스트레스도 날아가고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국민은행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었던 그는 1992년까지 코치와 지도자를 한 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은행 업무를 시작했고 지점장까지 했다.
“지도자 땐 선수들 훈련 때 함께 운동했어요. 은행 일을 볼 때도 축구를 놓을 순 없었습니다. 그 즈음 서울시 생활체육 여자축구단이 창단됐는데 저 보러 지도해달라고 해서 자원봉사로 함께 운동하기도 했죠. 1995년부턴 제가 사는 서울 양천구에 ’김진국 축구교실‘을 열어 주 2회씩 어린이들하고 공을 함께 차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2011년까지 KFA에서 행정을 했다. 유소년위원장과 기획실장, 전무까지 하며 우수 유소년선수 해외유학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그 프로그램 덕택에 손흥민(30·토트넘)이 독일 함부르크 유소년 클럽에서 유학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할 기회를 잡았다. 김 전 전무는 2002년 창설한 MBC꿈나무축구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유소년축구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김 전 전무는 KFA를 떠난 뒤 2012년부터 로얄 FC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실버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로얄 FC는 2005년 이회택과 김재한 등 1960, 70년대 한국 축구를 주름잡던 스타플레이어와 조기축구 회원들이 만든 팀이다. 매주 토요일 전국의 실버축구단 1, 2개 팀을 초청해 4~5시간 공을 찬다. 지방 원정 경기를 다니기도 하고 생활축구 전국대회에 출전하기도 한다. 국가대표 출신들이 많아 일본과 중국, 태국 등 해외 초청 경기에도 자주 간다. 수원북중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을 찼으니 근 60년 가까이 축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무릎 등 관절은 괜찮을까.
“선천적으로 건강한 신체를 준 부모님 덕분에 아직 관절엔 문제없습니다. 또 기술축구를 하면 힘도 안 들고 부상 위험도 없죠. 전 키가 작아서 어려서부터 기술로 승부수를 띄워야 했죠. 70이 넘은 지금도 가볍게 무리 없이 공을 차기 때문에 아직 어디가 불편하진 않습니다.”
김 전 전무는 경신고 재학시절 165cm에서 더 이상 크지 않는 키를 극복하기 위해 기술축구를 구사했다. 그는 당시 경신고 축구팀을 맡고 있던 장운수 감독이 “축구는 키가 작아도 얼마든지 기술로 커버할 수 있다”고 조언해 기술 축구에 전념했다고 했다. 당시 아침부터 밤까지 다양한 기술을 연마했고 결국 ’원조 접기(페인팅)왕‘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때 익힌 기술 덕에 대학, 실업팀, 국가대표는 물론 선수생활 막판 진출한 독일 프로축구팀에서 활약하면서도 큰 부상이 없었다.
지금도 힘들이지 않고 공을 차고 있는 원동력에 기술축구가 있다고 했다. “기술은 한번 익히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축구를 잘 하기 위해 홈트레이닝으로 체력도 키우고 있다. 스쾃과 팔굽혀펴기는 기본이고 아령 등 기구로 근육운동을 한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는 근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꾸준히 웨이트트레이닝을 해줘야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 김 전 전무는 1980년에 독일 2부 리그 다름슈타트에 입단했다. ’차붐‘ 차범근 전 수원 삼성 감독(69)에 이어 한국선수 유럽 진출 2호였다.
“이미 대표팀에서도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선수로서 유럽무대에서 성공해 보겠다고 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견문을 넓히는 차원에서 도전한 겁니다. 그때 서독이 축구로는 최고 선진국이라 직접 가서 배우고 싶었어요. 그냥 구경하는 것보다는 선수로 뛰면서 체험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시도했는데 다행히 계약이 돼서 입단하게 됐죠. 범근이 때문에 한국 선수에 대한 호감이 있을 때였죠. 1980년 1월부터 다름슈타트에서 6개월 뛰고, 여름에 같은 2부 리그에 있던 보름스(Worms) 팀으로 옮겨서 1982년 시즌까지 두 시즌을 뛰었습니다.”
김 전 전무는 차 전 감독의 고향(경기도 화성) 선배이자 경신고 선배이기도 했다. 차 전 감독이 고교 2년 후배로 입학하면서 차 전 감독 집과 4km 정도 떨어져 살았던 것을 알았다고 했다. 차 전 감독이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글에 ’김진국 선배가 유니폼과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게 멋있고 부러워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쓰기도 했다. 김 전 전무는 “나중에 알았는데 시골 중학생 범근이의 눈에는 내가 서울에서 축구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선수로 뛴 다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바로 실업 기업은행으로 갔고 나중에 건국대를 다녔다. “일찍 실업 무대에 뛰면서 실력도 늘고 대표팀에도 뽑혔다”고 회상했다. 김 전 전무는 1982년 보름스 나온 다음에 쾰른 체육대학에서 6개월간 지도자 코스 공부도 하고 돌아왔다.
그는 남은 인생 유소년 유망주들을 키우며 평생 축구를 즐기겠다고 했다.
“솔직히 언제까지 공을 찰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진 공을 찰 생각입니다. 이 나이에도 축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건강하다는 의미 아닌가요. 전 공 찰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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