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자동화 시장 개척 ‘에이블랩스’
바이오 연구자들 ‘용액 옮기는 고통’… 수작업 탓 오염-주입량 오류 우려도
수입 액체 핸들링 로봇은 수억 호가… 신대표, 자동화 전문가와 의기투합
창업 석달만에 시제품 만들어 주목… 3000만원에 세계적 수준 정확도
2010년대 초반 성균관대 대학원 융합의과학과에 진학해 삼성의료원에서 연구하던 한 대학원생 앞에 난제가 놓였다. 암세포에 가장 효능이 좋은 약을 찾기 위한 실험을 하는데 환자의 암세포에 떨어뜨려야 하는 약이 100여 종, 같은 약을 7단계의 농도로 실험해야 했다. 거기다 각기 다른 환자에게서 채취한 암세포가 600여 개나 됐다. 검증을 위해 3번을 반복하면 126만 번이나 일일이 수작업으로 ‘피페팅(pipetting·미세한 양의 액체 옮기기)’을 해야 했다. 에이블랩스 신상 대표이사(34)에게 이 고통스러운 불편은 창업의 씨앗이 됐다.
○ 고학력 연구자들의 단순 노동
시약 등을 조금씩 나눠서 분배하는 피페팅은 바이오 실험실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바이오 실험을 처음하게 되는 학생이나 연구원에게는 선배들이 임의의 용액을 주면서 1μL(마이크로리터·1000분의 1mL)씩 1000번을 옮겨서 1mL를 만들어 보게 한다. 증발이나 피펫(미세한 양의 액체를 옮기는 기구)에 남아 있는 용액 등 여러 변수 때문에 1000번을 옮겨도 1mL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연구실에서 민감한 실험을 해야 할 때 손재주가 좋은 연구원을 찾는 이유다.
지금도 전 세계 연구자의 90%가량은 수작업으로 바이오 실험을 하고 있다. 수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하루 종일 피페팅으로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한다. 오염 위험과 부정확한 주입량 문제 등도 있다. 과학적 발견은 다른 연구자들이 재현할 수 있어야 인정을 받는데, 수작업으로 인한 낮은 재현성은 우리 바이오 연구의 발전에도 걸림돌이다.
코로나 검사를 위한 유전자증폭(PCR) 검사도 전(前)처리 과정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피페팅해 수행한다. 경제적인 가격에 자동화가 가능하다면 한 사회의 방역 대응 역량도 훨씬 커질 수 있다.
○액체 핸들링 로봇
에이블랩스가 만든 액체 핸들링 로봇은 시약을 자동으로 정교하게 8개씩 한꺼번에 내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얼핏 보면 단순하지만 정량을 흡입해 정량을 내보내는 데는 예사롭지 않은 기술이 필요하다. 시약의 농도 등 특성에 따라 어떤 속도로 흡입하고 어떤 속도로 내보내는지가 중요하다. 끈적끈적한 성질의 용액을 여느 용액과 같은 속도로 흡입하면 용액 중간에 기포가 생겨 정확한 양을 측정하고 내보내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에이블랩스의 로봇에는 미세한 압력을 감지하는 센서 등이 있어 용액의 특성에 맞춰 빨아들이고 내보내는 속도를 자동으로 조절한다. 액체의 수위를 감지해 적정한 깊이만큼 피펫을 담그고, 누수나 막힘도 감지한다.
대형 병원이나 대형 제약사 등에서는 수억 원을 들여 스위스나 독일산 기기를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특정 용도에 딱 맞게 설치되고, 기술자 없이는 마음대로 실험을 디자인하기 힘들다. 5억∼6억 원을 들인 장비인데 할 수 있는 기능은 한두 가지가 전부인 유연하지 못한 구조를 갖고 있다. 신 대표는 삼성의료원에서 외산 장비로 실험 자동화를 구축할 때 이런 불편을 크게 느꼈다. 에이블랩스의 액체 핸들링 로봇은 연구자가 원하는 실험을 마음대로 디자인할 수 있도록 유연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액체 핸들링 로봇 내부에 12개의 슬롯을 두고 연구자가 원하는 실험을 앱으로 간편하게 디자인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했다.
신 대표는 “수억 원 하는 스위스나 독일 제품과 비슷한 세계 최고 수준의 정확도를 확보했다”며 “3000만 원의 가격대로 대학 연구실에서도 사용할 정도의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고 했다. 정교하고 재현성 높은 실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액체 핸들링 로봇은 공공 연구기관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에서 사용 중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는 매초 계속해서 20μL씩 용액을 옮기는 공정에 적용 중이다. 증류수 한 방울 부피(약 50μL)의 절반에 못 미치는 양을 1초 단위로 계속 제어하는 일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바이오와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전문가의 만남
고려대 생명공학부를 졸업한 신 대표는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융합의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임상에 적용될 실용적인 분야를 연구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기계와 컴퓨터를 좋아하던 자신의 취향을 살려 연구실 자동화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삼성의료원에서 연구실 자동화를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이후 병역특례를 위해 반도체 검사 장비 제조업체에서 일하면서 정밀한 부품과 실용적인 부품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그 회사 실험실 자동화 사업 부문에서 공동 창업자가 될 고남일 이사(35), 박상영 이사(32)를 만났다. 고 이사는 자동 세포배양 시스템 등 바이오 자동화 하드웨어 전문가이고, 박 이사는 세포배양 알고리즘 등 바이오 실험 관련 소프트웨어 전문가다. 신 대표는 “두 전문가를 동료로 만나 오랫동안 상의하다 보니 고학력 연구원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겠다 싶어 창업을 실행하게 됐다”고 했다.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 작년 2월 창업했고 같은 해 8월에 ‘액체 핸들링 장치’의 특허를 출원해 올해 2월 등록을 마쳤다. 창업 3개월 만에 시제품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보여주며 투자를 유치했다. 신 대표는 “창업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주문이 늘고 있지만 생산량(월 1대)이 따라가지 못해 외주 공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구독과 ‘로보틱 클라우드 실험실’
에이블랩스가 우선 목표로 하는 고객은 대학 및 연구기관이다. 저예산으로 인해 기존에는 액체 핸들링 자동화 로봇 도입이 힘들었던 곳들이다. 에이블랩스는 이들이 참여하면 국내에서만 4000억 원 규모의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에이블랩스는 소규모 연구실에서도 액체 핸들링 로봇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내년에는 로봇 구독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신 대표는 “연구용역 과제 등을 수행할 때 장비 구입 예산이 넉넉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필요한 기간만큼 빌려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글로벌 액체 핸들링 자동화 시장은 약 7조 원 규모로 추산된다. 에이블랩스는 내년 초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에이블랩스는 실험 자동화를 통해 바이오 연구의 패러다임을 혁신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에이블랩스가 그리는 미래는 ‘로보틱 클라우드 실험실’을 통한 실험실의 자동화와 원격화다. 지금 많은 기업이 컴퓨팅 파워를 네이버나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에서 사용하듯, 연구자들이 자신이 디자인한 바이오 실험을 에이블랩스가 운영하는 로봇에 의해 자동화된 실험실에서 수행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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