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
노후 위협하는 3대 가족리스크〈下〉
여성 경제 지위 향상 따라 급증
고독-건강취약 이중고 남편 치명적
지난 회 100세 카페에서 가족과 관련된 노후 복병으로 자식 리스크와 간병 리스크를 든 바 있다. 이보다 더 큰 위협 요인으로 황혼이혼을 꼽는 사람이 적지 않다. 황혼이혼은 남성에게 더 불리하다. 방심하고 있다가 ‘당하게’ 되면 더 치명적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슬기롭게 피해 갈 방법은 없을까.
○지난해 이혼 부부 10쌍 중 4쌍이 황혼이혼
자녀를 모두 성장시킨 뒤 오랜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부부가 늘고 있다. 이른바 황혼이혼이다. 명확한 법적 정의는 없지만 대법원과 통계청은 결혼 기간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을 황혼이혼으로 분류한다. 1990년만 해도 전체 이혼 건수의 5.1%에 불과했던 황혼이혼은 꾸준히 늘어 지난해에는 38.7%나 됐다(그래픽 참조). 지난해 이혼한 부부 10쌍 중 4쌍이 황혼이혼이었다는 얘기다.
오랜 세월 해로한 부부가 갈라서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시대 변화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고, 재산 분할에서 여성 몫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혼을 자연스러운 개인의 선택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경제력을 가진 베이비붐 세대는 자신이 아직 젊다고 느끼는 데다 개인의 자유와 삶의 질을 중시한다. 여기에 고령화로 기대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앞으로 30년을 더 참으며 살 수 없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다주택 중과세를 피해 결혼 생활을 정리하는 노부부가 부쩍 늘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 “소중한 내 인생, 노후 30년은 자유롭게 살겠다”
황혼이혼이란 용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유래했다. 남편이 퇴직금을 받은 뒤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급증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1991년 일본 정신신체의학학회지에 은퇴남편증후군(RHS·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일밖에 모르던 가부장적 남편이 은퇴 후 집에만 머물자 스트레스를 받은 늙은 아내들이 각종 질환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증세는 심한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위염, 두드러기 등 다양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60%의 아내들이 RHS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이런 은퇴 남편을 일컬어 한국의 ‘삼식이’(세 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처럼 일본에서는 ‘젖은 낙엽족’(낙엽이 비에 젖어 잘 쓸리지 않는 상태를 빗댄 말. 귀찮게 방해만 되는 남편을 일컬음) ‘나도족(私も族·아내가 가는 곳 어디든 “나도 가겠다”며 따라나서는 남편)’ 등의 유행어가 생겨났다. 퇴직 이후 삶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은퇴해 거실 소파를 장악하고 TV나 신문만 보는 남편들은 ‘대형 쓰레기’라 불리기도 하고, “모름지기 가장(家長)은 건강해서 외출한 상태가 최고”라는 말이 회자(膾炙)됐다.
여기에 더해 남편이 왕년의 ‘상사’ 기질을 발휘해 집안일에 일일이 간섭하며 잔소리를 시작하면 아내들도 폭발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고집이 강해지며 잔소리도 심해지기 쉽다.
○중년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에 꽂히는 이유
반대로 최근 한국에서는 남편이 먼저 황혼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늦게나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거나 아내의 잔소리나 경제적 요구가 싫어 자유를 택하겠다는 남편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남성들 사이에 ‘나는 자연인’류의 프로그램이 인기인 이유도 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조혜정 이혼전문 변호사는 수많은 상담을 통해 황혼이혼을 하는 부부의 공통점을 8가지로 추려냈다. △정서적 이혼 상태가 상당 기간 이어졌다(한집에서 살지만 대화 없이 몇 년을 지냈다) △돈 때문에 심하게 싸운 경험이 있다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내 돈을 쓰는 가족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주로 생활비를 벌던 사람이 은퇴했다 △결혼해서 생긴 가족보다 원가족(남성은 본가, 여성은 친정)과 더 가깝다 △집안이 갈라져 있다(자녀가 부모 중 한쪽 편을 든다) △한쪽이 지배하고 복종을 강요한다 △외도 폭언 폭행 중 한 가지 이상이 나타난다 등이다. 조 변호사는 이 중 5가지 이상에 해당된다면 이혼 상담을 받아볼 필요가 있지만, 2∼3가지 정도라면 남들보다 나은 상태니까 문제를 개선할 길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황혼이혼에서는 재산 분할이 큰 이슈
젊은 부부의 이혼에서 위자료나 양육권, 양육비가 쟁점이라면 황혼이혼에서는 재산 분할이 가장 큰 이슈가 된다. 분할 대상은 원칙적으로 혼인 중 부부가 협력해서 모은 재산, 퇴직금이나 연금 등 장래 수입도 포함된다.
재산 분할은 결혼 기간이 길수록 양측에 비슷하게 배분되기 쉽다. 예컨대 혼인 전부터 배우자가 소유하고 있었거나 상속 또는 증여받은 ‘특유재산’은 원칙상 분할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혼인 기간이 길면 얘기는 달라진다. 직업이나 경제 활동이 없던 주부라도 그 재산의 유지 및 증식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평생 외벌이로 혼자 벌고 자신의 명의로 연금을 부었다 해도 그 기간 배우자의 내조가 있었다면 절반은 배우자 몫이 된다.
황혼이혼에서는 합의 이혼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일단 소송으로 가게 되면 재산 분할의 대상, 기여도에 대한 입증이 핵심 쟁점이 된다. 분할 결과에 따라 노후 삶의 질이 결정되는 만큼 피 튀기는 ‘쩐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부분 남성에게 더 치명적
황혼이혼은 부부 모두에게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안겨주지만 남성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첫째, 부부 모두 경제적 타격이 크다. 평생 모은 노후 자산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연금도 절반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나누다 보면 낭비도 많다. 이혼 이후 경제적 생활 수준이 확 떨어질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둘째, 외로운 노년을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 인생 황혼기에 잃어버린 동반자의 빈자리는 크다.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존재가 없어진다. 시기적으로 퇴직과 겹치다 보니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고, 모든 것에 실패했다는 허무감과 우울감에 휩싸이기 쉽다. 점차 사회 활동이 줄고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면 종착역은 고독사(死)가 될 수도 있다.
셋째, 살림 경험이 없는 남성이라면 갑작스러운 자취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건강관리에 게을러지거나 삶의 동력을 잃기 쉽고 우울증이나 자살 빈도도 높아진다.
이 부분은 사별 후 남녀의 반응 차이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많은 조사에서 남편이 먼저 사망한 부인들은 얼마간의 상실과 우울의 시간을 거치고 나면 건강이 좋아지고 인생 만족도가 높아지며 장수했지만,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남편들은 건강이 나빠지고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있을 때 잘하자” 노부부, 서로 존중과 배려를
결혼도, 이혼도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다.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혼은 적극적으로 감행돼야 한다.
예컨대 폭력이나 폭언, 외도가 상습적인 경우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으며 살아왔지만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경우는 과감하게 이혼에 나설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많은 리스크를 져야 하는 이혼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노력이 우선이다.
고혜정 변호사는 “가장 큰 노후 대책은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많아도 내가 병으로 몸져눕게 된다면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은 결국 배우자입니다. 하지만 좋은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지 않지요. 준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계는 누적되는 법이다. ‘노후의 재앙’ 황혼이혼을 피하려면 스스로 변화하고 가족, 특히 배우자와 평소에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은퇴 전문가 오가와 유리가 제시하는 ‘은퇴남편 관리법 15조’(그래픽 참조)는 이 시기 부부 모두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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