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 예순이 넘은 마스터스 마라토너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함께 간 사진 기자도 “이렇게 젊어 보일 수가 없다”고 했다. 노수영 메리츠증권 상무(63)는 “달리기 덕분”이라고 했다. 업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는데 젊음도 따라서 왔다. 그가 평생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는 이유다.
“달린지 한 30년 됐습니다. 영업하다보면 술도 많이 마시게 돼요. 스트레스를 건전하기보다는 유해한 방식으로 풀 때가 많았죠. 그러다보니 몸도 망가지고…“
‘머니게임’을 하는 증권회사에 근무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다 큰 일 날수도 있다”는 생각에 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였다. 달리면 모든 것을 잊고 잠시나마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기분도 좋았다.
달리다 보니 달리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경기 군포의 해오름 마라톤클럽에 가입했다. 지점에 근무할 땐 지점 사원들하고도 함께 달렸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마라톤대회에도 출전했다. 지금까지 42.195km 풀코스를 60회 넘게 완주했다. 개인 최고기록은 2014년 가을 춘천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47분대다. 그는 “잘 달리는 분들은 서브스리(2시간대 완주)에도 완주하는데 난 즐겁게 달리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지금도 4시간대로 기록엔 신경 쓰지 않고 달린다.
“주변에 무리하다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많이 있어요. 왜 죽기 살기로 달리는지… 즐겁고 건강하자고 달리는 것 아닌가요?” 노 상무는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과 춘천마라톤 등 주로 메이저 대회에만 출전한다. ‘펀런(즐겁게 달리기)’를 하다보니 서브스리를 해야 주는 ‘동아마라톤 명예의 전당’에는 가입하지 못했지만 10회 이상 풀코스 완주자에게 주는 ‘춘천마라톤 명예의 전당’에는 2014년 가입했다.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동아마라톤 서울 코스. 그는 “언제 서울 시내를 달려볼 수 있나? 대한민국의 상징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잠실종합운동장으로 골인하는 것도 너무 감동적이다”고 했다.
“제 차안엔 러닝슈즈와 운동복이 항상 비치돼 있습니다. 일이 바쁘다보니 시간 날 때 사무실 근처 여의도 공원이나 한강공원을 달립니다. 저는 제대로 달릴 때는 주로 국립극장 쪽에서 출발하는 남산 북측순환로를 찾습니다. 오르막내리막이 적당히 있어 훈련에 최고입니다. 하루에 10~15km 정도 달리면 온갖 잡념, 스트레스가 날아갑니다.”
풀코스도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절대 완주하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대회가 열리지 않다가 올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마라톤 시즌이 시작됐지만 그는 춘천마라톤 10km에 출전해 완주했다. 그는 “풀코스를 달리려면 최소한 3개월은 준비해야 한다. 하루 10~15km, 총 500km이상은 달려야 무리 없이 완주할 수 있다. 3개월 철저하게 준비하고 완주하면 몸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고 했다.
마라톤에 빠지면서 골프를 끊었다. 그는 “영업 초창기에는 골프를 쳤는데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데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장비도 챙겨야 해 일찍 접었다. 일상 속에서 틈나는 대로 할 수 있는 달리기가 내겐 가장 좋았다. 증권사 임원 중에 골프 안치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노 상무는 주말엔 주로 산을 찾는다. 대회 출전을 앞두고는 20~30km 장거리를 달리지만 등산이 주는 맛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 속 좋은 공기를 마시며 오르막 내리막을 걷다보면 훈련 효과도 크다. 가장 좋아하는 산은 북한산. “언제 가든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명산”이라고 했다.
나이는 70세를 향해 가지만 종합검진에서는 40대 몸으로 평가될 정도로 건강하다. 체중도 65kg에서 변화가 없다. 노 상무는 마라톤을 통해 배운 도전정신과 지구력으로 아직도 ‘살얼음판’ 증권가에서 버티고 있다. “몸이 건강해야 일도 잘 한다”는 철칙을 평생 실천한 결과다. 같은 또래 친구들은 벌써 떠나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실제로 증권가에서는 60세 넘어서까지 일하는 경우는 드물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사장 되는 게 업계의 관행이다. 그만큼 노 상무가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달리면서 배운 게 자신감입니다. 아직 뛸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집니다. 제가 특전사 출신인데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구호가 있는데 ‘달리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산악마라톤인 트레일러닝과 철인3종엔 발을 들이지 않았는데 조만간 시작할 예정이라고. “산이 주는 묘미가 다르고, 사이클과 수영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고.
노 상무는 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 감사를 맡고 있다. 1979년 12월 제3공수특전여단에 입대해 1982년 9월 제대한 예비역 병장인 그는 2011년 8월 창설된 특전예비군에 가입해 매년 동원훈련까지 하고 있다. 특전예비군은 20만 명이 넘는 북한의 특수부대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었다. 사격, 헬기레펠(하강·Rappel), 패스트로프(굵은 로프를 내려오는 훈련), 모형탑(11m에서 뛰어내리는 훈련) 등 적지로 침투해서 싸울 수 있는 모든 훈련을 한다. 그는 특전예비군 최고령이지만 마라톤으로 쌓은 체력 덕분에 후배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특전예비군은 64세까지 동원훈련을 하고 있는데 매년 예비군 인원이 감소해 동원훈련을 67세로 연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창설 당시 거창했지만 어느 순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예비군들이 떠나고 있어요. 2014년 1200여명이었는데 지금은 600여명 밖에 되지 않아요. 요즘 군대가 좋아져서 특전사 병사들이 전역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데 왜 예비군은 잘 관리하지 못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전 67세까지 동원 훈련에 참가할 생각입니다.”
노 상무는 마라톤동호회와 특전예비군에서 봉사활동도 많이 한다. 그는 “코로나19 초기 때 사람들이 밖에 다니는 것을 무서워할 때 때 공동시설 방역도 했다. 산불 났을 때는 지역 특전예비군을 동원해 불을 끄기도 한다”고 했다.
노 상무는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달릴 계획이다.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전 달리지 못하면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매일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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