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는 2009년 5가지 이상의 약물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다약제 복용’이라고 규정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지난해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5가지 이상의 약을 3개월 이상 복용하는 65세 이상의 내국인 고령자는 2010년 165만 명에서 2019년 275만 명으로 늘었다. 10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한 경우도 같은 기간 40만 명에서 94만 명으로 급증했다.
외국과 비교해도 국내 고령자의 다약 복용 정도가 심하다. 2019년 기준으로 75세 이상의 국내 환자 중에서 5가지 이상의 처방약을 3개월 복용한 비율은 70.2%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48.3%)를 한참 웃돈다. 강혜련 서울대병원 약물안전센터장(알레르기내과 교수)은 “이 통계에는 일반의약품, 건강기능식품, 한약이 포함돼 있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은 약을 먹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국의 고령자가 약을 먹어도 너무 많이 먹는 셈이다. 이대로 괜찮을 걸까. 강 교수는 “적절한 약의 복용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약을 동시에 먹는 것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여러 약물 동시 복용, 부작용 확률 커”
강 교수는 국내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65세 이상 고령자가 5가지 이상 약물을 복용할 경우 4가지 이하의 약을 먹을 때보다 입원 위험이 18%, 사망 위험이 25% 증가했다”고 말했다. 다약 복용 환자들이 입원하거나 응급실을 방문할 확률은 2배, 사망 확률은 3배 높았다. 다약 복용의 부작용은 의외로 흔하다며 그가 들려준 사례를 살펴보자.
70대 후반 남성 A 씨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병원에서 정기검사를 받던 중 저혈압 쇼크가 왔다. 여러 검사를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의료진은 A 씨가 복용 중인 15가지 약의 성분을 확인했다. 그중에 혈압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있는 약이 있었다. 그 약물만 끊었는데 혈압이 다시 올라갔고, A 씨는 의식을 되찾았다.
70대 초반 여성 B 씨는 천식 환자다. 어느 날부터 소변이 잘 안 나오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 응급실로 실려 왔다. 검사해 보니 팔다리 근육에 염증이 발생했고, 그 여파로 콩팥까지 손상된 상태였다. 급히 신장 투석을 했다. 나중에 보니 B 씨 또한 약물 부작용이 원인이었다. 감기에 걸려 동네의원에서 약을 처방받았는데, 그중 위장을 보호하는 알약의 성분이 천식을 악화시킨 것이다. 다행히 치료는 잘 끝났지만 조금 더 늦었더라면 치명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C 씨는 결핵 치료를 1년 넘게 받았던 60대 남성이다. 결핵 약은 사람에 따라 가려움증을 유발한다. C 씨도 그랬다. 너무 가려웠지만 다른 치료법이 없다고 생각해 참았다. 하지만 이 또한 약물 부작용이었다. C 씨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먹었던 약이 가려움증을 유발했던 것이다. C 씨가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콜레스테롤 약을 다른 성분으로 바꿨을 것이다. 물론 가려움증으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C 씨로서는 억울할 따름이다.
● 다약 복용 부작용 막으려면
많은 약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으로는 어지럼증, 졸림, 낙상, 인지 저하, 구역질, 구토 등을 꼽을 수 있다. 복용 기간이 길어지면 콩팥 손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런 부작용은 젊은층보다는 고령자에게 더 많이 나타난다. 강 교수는 “노인들은 간과 콩팥은 물론이고 전체적 신체 기능이 떨어져 있다”며 “젊은층과 동일한 용량의 약을 먹어도 몸 안에 더 오래 머물다 보니 이상 반응이 더 많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개의 약을 먹어도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단 함께 먹으면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된 약들은 ‘의약품 안전사용 서비스(DUR·Drug Utilization Review)’를 통해 걸러진다. DUR는 의사와 약사가 약을 처방하거나 조제할 때 의약품 안전성 정보를 컴퓨터 화면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다만 이 시스템도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은 잡아내지 못한다. 환자가 여러 병원에서 처방받아 온 내력을 정확히 알 수도 없다. 이 시스템만으로는 다약 복용의 부작용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새로운 약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변화를 잘 체크해야 한다. 이를테면 새로운 약을 먹은 이후로 △1, 2일 만에 가려움증이 나타나거나 △7~10일 이후에 전신 발진이 나타나거나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거나 △구토 증세가 있다면 다약 복용 부작용을 의심해야 한다.
약물 성분이 서로 충돌해 발생하는 부작용도 있다. 환자가 알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의사에게 복용 중인 약의 목록을 주고 상담을 받는 게 좋다. 전국의 대학병원 등에 설치된 한국의약품안전원 지역의약품안전센터에서도 약물 부작용 상담이 가능하다.
건강보험공단이 시범 진행 중인 ‘다제약물 관리 사업’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 사업에 참여한 병원에서는 입·퇴원과 외래 진료 때 다약 복용 상담이 가능하다. 약사들이 직접 10가지 이상의 약을 복용 중인 만성질환자를 방문해 상담해 주기도 한다. 건보공단, 각 병원, 대한약사회 등에 문의하면 된다.
● 환자들의 잘못된 약 복용 습관도 고쳐야
이와 별개로 노인들이 약 복용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례도 허다하다고 강 교수는 말했다. 가령 “진통제를 하루 2회 복용하라”고 처방했는데도 통증이 나타난다며 임의로 더 먹는 노인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약 복용 기간에는 금주를 당부했지만 이를 어기는 사례는 너무 많다. 이 경우 약의 효과가 떨어질 뿐 아니라 간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항생제, 항진균제, 타이레놀을 비롯한 아세트아미노펜 계열 약물, 항히스타민제는 술과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 또 중추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 수면제나 항우울제를 복용할 때도 반드시 금주해야 한다.
임의로 약을 먹었다가 끊었다가 다시 먹기를 반복하는 사례도 많다. 강 교수는 “재진 환자 중에 상당수가 처방약을 다 먹지 않은 상태로 온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아침 식전에 복용했는데 깜빡 잊고 식전과 식후에 중복으로 복용하는 경우 △약이 떨어졌다며 다른 사람의 처방약을 얻어먹는 경우 △유통 기한이 지난 약을 먹는 경우도 많다. 강 교수는 “유통 기한이 지난 약은 효과가 떨어질 뿐 아니라 변질로 인해 독성이 생길 수도 있다”며 “복통이나 두드러기, 콩팥 손상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치료제 아닌 ‘영양제’는 많이 먹어도 될까
치료제가 아닌 영양제는 많이 먹어도 상관없을까. 강혜련 교수는 “영양제는 의약품이 아닌 식품이기에 건강한 사람의 경우 대체로 무방하다”면서도 “하지만 질병이 있다면 여러 영양제를 동시에 복용할 때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에 성분을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퇴행성관절염,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 약을 복용한다면 비타민과 무기질 성분을 확인해야 한다.
가령 고지혈증 치료제와 고용량의 비타민C, 비타민E를 함께 복용하면 치료 효과가 떨어진다. 녹내장 치료제(아세타졸라마이드 성분)를 비타민C와 같이 먹을 때도 신장 결석이나 요로 결석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아스피린과 비타민E를 같이 먹으면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뇌중풍(뇌졸중), 심방세동 등 심·뇌혈관 환자들은 혈액 응고를 막는 약물(와파린 성분)을 복용하는데, 동시에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비타민K를 같이 먹으면 약효가 떨어진다. 혈전 약과 오메가3를 동시에 먹으면 오메가3가 혈액 응고를 방해해 출혈 위험이 높아진다.
이 밖에도 △적절한 용량만 섭취하며 건강 검진을 통해 영양 성분이 충분하다면 복용을 중단하고 △두드러기, 가려움증, 어지럼증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면 즉각 복용을 멈출 것을 권했다. 또 유통 기한이 지난 영양제는 독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 강 교수는 병이 있는 환자들은 영양제를 선택하기 전에 의사나 약사와 상의할 것을 권했다.
강 교수는 영양제 복용이 ‘차선책’임을 강조했다. 먼저 매주 3회 이상 운동하고, 절주 혹은 금주하며 균형 잡힌 식사를 한 뒤에도 영양제가 필요하다면 먹으라는 주문이다. 강 교수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굳이 영양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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