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중반 여성 A씨는 21년 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피곤하고 숨이 찼다.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피부에 붉은 반점 같은 것이 늘어났다. 모세혈관이 터지면서 생긴 ‘자반 출혈’이었다. 급성 백혈병의 대표적 증세 중 하나다.
A씨는 가톨릭대 의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장인 김희제 혈액내과 교수를 찾았다. 김 교수는 A씨 형제에게서 조혈모세포를 추출해 A씨에게 이식했다. A씨는 이후 재발이나 합병증을 경험하지 않았다. 20년 이상 조혈모세포 이식 ‘성공’ 상태를 유지하는 가장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B씨(47)는 지난해 5월 다발골수종 2기 진단을 받았다. B씨도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먼저 항암 치료를 한 뒤 12월 말에 미리 추출해 뒀던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했다. 결과가 좋아 올 1월 퇴원했다. 그는 회복 과정이 순조로워 상태를 관찰하는 ‘유지 요법’을 시행 중이다.
B씨는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이 국내 최초로 1만 번째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환자다. 김 혈액병원장은 “처음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후 40년 만에 달성한 기록으로 이식 의학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성과를 달성했다”고 자평했다. 김 원장에게 조혈모세포 이식 역사와 향후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혈액질환 치료에 조혈모세포 이식
조혈모세포(HSC)는 혈액 세포를 만드는 줄기세포다. 성인의 골수에 주로 있으며, 많지는 않지만 말초혈액에서도 발견된다. 탯줄 혈액인 제대혈에도 들어있다. 이 조혈모세포가 손상되면 백혈병, 다발골수종 등의 혈액암을 비롯해 여러 중증 혈액 질환이 발생한다.
이때의 치료법이 바로 병든 조혈모세포를 제거하고 건강한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것이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통계에 따르면 조혈모세포 이식을 가장 많이 하는 혈액 질환은 급성 백혈병이다. 이어 다발골수종, 재생불량빈혈, 골수형성이상증후군, 비호지킨림프종, 골수증식종양 등의 순이다.
조혈모세포 이식은 자가이식과 동종이식으로 나뉜다. 자가이식은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냉동 보관했다가 항암 치료를 끝낸 후 해동해 주입하는 방식이다. 동종이식은 가족이나 타인에게서 조혈모세포를 받는 방식이다.
대체로 자가이식보다 동종이식의 난도가 높다. 김 원장에 따르면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에서도 한두 병원을 빼면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 비중은 45~50% 정도다. 이른바 국내 ‘빅5’ 병원 평균치도 43% 정도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은 이 비중이 74%에 이른다.
급성 백혈병,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재생불량빈혈 등은 동종이식을 표준 치료로 삼는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은 조혈모세포에 비정상적인 세포군이 만들어지면서 혈구가 줄어드는 병이다. 재생불량성빈혈은 골수 기능이 떨어지면서 발생한다. 급성 백혈병 또한 골수에서부터 병이 시작된다. 세 질병 모두 조혈모세포가 병의 근원이기에 자가이식의 효과가 높지 않은 것이다.
다발골수종, 림프종 등은 처음부터 골수에서 병이 시작된 게 아니다. 따라서 골수가 크게 손상되기 전이라면 항암치료의 보조 요법으로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 치료를 많이 한다.
●40년 전 급성 백혈병 환자에 첫 시행
조혈모세포 이식이 표준치료로 자리 잡은 현재 전국 이식 건수의 25% 정도를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이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비중은 40%를 넘었다. 다른 대학병원을 거쳐 온 환자들도 많아 ‘혈액암의 4차 병원’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였다.
국내 조혈모세포 이식 역사는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춘추·김동집 가톨릭대 의대 명예교수가 급성 백혈병 환자에게 처음 시행했다. 두 교수는 환자의 가족에게서 채취한 조혈모세포를 이식했다. 처음부터 난도가 높은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에 성공한 셈이다. 2년 후에는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에도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조혈모세포 이식 인프라는 열악했다. 우선 진단 자체가 어려웠다. 조혈모세포 공여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연구비가 없어 김춘추 교수가 전셋집을 뺀 돈으로 동물실험을 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조혈모세포 이식에 성공한 후로도 이 치료법이 빠른 속도로 확산하지는 않았다. 환자들 사이에서는 조혈모세포를 뽑으면 허리가 아프다는 등의 편견이 퍼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모든 이식 건수를 합쳐도 100건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때도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은 새로운 치료에 도전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 간 조혈모세포 이식(1995년) △제대혈 이식(1996년) △비골수제거 조혈모세포 이식(1998년) △혈연 간 조직형 불일치 조혈모세포 이식(2001년) 등 국내 첫 기록을 쏟아냈다. 이런 성과 덕분에 2000년대로 접어들 무렵 국내 조혈모세포 이식 건수는 연간 300건으로 뛰었다.
2002년에는 세계 최초로 만성 골수성 백혈병과 간경화를 동시에 갖고 있는 환자에게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후 간을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2012년에는 신장과 조혈모세포를 동시에 이식하기도 했다.
●아시아 최대, 미국에도 안 뒤처져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은 국내 최대 규모다. 7개 전문센터로 운영된다. 35명의 교수가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단일 의료기관이 40년 만에 조혈모세포 이식 1만 건을 달성한 것은 해외에서도 드문 사례다.
실제로 테시마 타카노리(豊嶋崇徳) 일본 조혈모세포이식학회 회장(홋카이도 대학 교수)은 이달 초 김 병원장에게 e메일을 보내 “일본 10개 병원이 시행한 이식 건수를 단일 기관이 달성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축하했다. 일본의 경우 조혈모세포 이식이 가능한 의료기관은 300여 곳이지만 대체로 규모는 작은 편이다.
유럽에서는 조혈모세포 이식술이 국내나 일본처럼 빈번하게 이뤄지지 않아 직간접 비교는 어렵다. 세계 최대 규모 병원들이 몰려 있는 미국과 비교하면 어떨까. 김 원장에 따르면 MD앤더슨, 하버드대학병원 등 5, 6곳만이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보다 이식 건수가 많거나 비슷하다. 다만 난도가 높은 동종이식의 비중만 따로 집계할 경우 이런 병원들도 65% 정도로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74%)보다 낮다. 김 원장은 “규모나 질적인 면 모두에서 글로벌 병원과 대등하기까지는 그동안 연구와 치료에 모든 것을 바친 의료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재발 낮추고 합병증 극복이 과제
조혈모세포 이식이 가장 많이 시행되는 질환인 급성 백혈병의 경우 세계 평균 생존율은 24~35%다. 김 원장에 따르면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의 생존율은 45% 정도다.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김 원장은 “절반 이상의 환자가 완치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급성 백혈병 조혈모세포 이식의 경우 넘어야 할 장애물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가 30% 이상인 재발률이다. 김 원장은 “과거 재발률은 50%였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많이 낮추긴 했지만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단점은 동종 이식의 가장 큰 부작용인 이식편대숙주병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식받은 환자의 30% 정도에서 발생하는데, 공여자의 세포가 환자의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병이다. 폐, 간, 뇌, 피부 등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다. 재발과는 다르지만 삶의 질을 크게 약화시킨다. 김 원장은 “면역억제제의 용량을 조절하거나 공여자의 세포를 일부 약화시켜 투입하는 등의 노력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희망적이라고 했다. 우선 이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 다른 치료법인 세포면역항암 치료제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김 원장은 “혈액암이 불치병이 아니라 완치병이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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