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의 패러다임이 2D 게임에서 3D 게임으로 전환된 건 이미 오래전이다. 3D 개발의 난이도와 효율이 2D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3D 게임이 아닌 2D 게임을 고집하는 게임 개발사들이 있다. 3D로는 재현하기 힘든 2D 그래픽 특유의 맛이 있다는 이유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2D를 고집하는 개발사들은 종종 ‘2D 장인’으로 일컬어지곤 한다. 창작자로서의 고집과 철학을 생산 효율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이 장인 정신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2018년 출시된 ‘에픽세븐’을 개발한 슈퍼크리에이티브도 여전히 2D를 고집하는 몇 안 남은 개발사 중 하나다. ‘애니메이션을 플레이하다(Play the Animation)’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에픽세븐은 슬로건에 걸맞은 비주얼로 오랜 기간 사랑받았고, 최근에는 중국 시장에도 진출하며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개개인이 아무리 장인 정신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회사의 적절한 뒷받침이 없다면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슈퍼크리에이티브는 구성원들이 장인 정신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에픽세븐의 비주얼을 총괄하는 비주얼아트실 류한경 아트디렉터(AD)를 만나 이에 얽힌 얘기를 들었다.
류한경 AD는 2001년 게임 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그 직후 2002년부터 애니메이션 업계에 몸을 담았다. 2014년까지 국산 애니메이션 ‘내 친구 해치’와 ‘스파이더맨’, ‘어벤져스’ 등 마블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 다시 게임 업계로 돌아와 2015년 슈퍼크리에이티브의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슈퍼크리에이티브의 첫 프로젝트이기도 했던 에픽세븐은 기획 단계부터 뛰어난 비주얼에 초점을 맞췄다. ‘파이날판타지6’와 같은 2D 시절 고전 명작 게임에 영향을 받아, 현대적 비주얼 갖춘 2D 턴제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류한경 AD는 “시중에 퀄리티 높은 3D 게임이 워낙 많아, 2D 게임으로 이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그만큼 높은 퀄리티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뛰어난 비주얼 퀄리티를 갖춘 2D 턴제 RPG’를 만들겠다는 지향점은 인력 구성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에픽세븐 스튜디오 전체 인원 중 40%가 비주얼아트실 소속일 정도로 비중이 높다. 콘티팀, 캐릭터원화팀, 배경원화팀, 애니메이션팀, 포트레이트 애니메이션팀, 이펙트팀, 컷인팀, 리소스원화팀 등으로 구성된 비주얼아트실은 에픽세븐의 모든 비주얼 요소를 작업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류한경 AD는 에픽세븐이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로 ‘일정을 위해 퀄리티를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방영 날짜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무조건 맞춰야 하기 때문에 퀄리티를 타협하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하지만 에픽세븐은 개발 초기부터 ‘타협하지 않는 퀄리티’를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웠다. 작업자가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내기 위해 추가 일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면, 회사 차원에서 이를 최대한 지원하는 편이다”고 말했다.
물론 에픽세븐은 라이브 서비스 중인 게임인 만큼 개발 일정이 곧 이용자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아무리 퀄리티 때문이라고 해도 출시를 차일피일 미룰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슈퍼크리에이티브에서는 프로젝트 매니저(PM)들이 처음부터 지나치게 촉박한 일정이 제시되지 않도록 여유를 두고 세심하게 일정을 관리하고 있으며, 인사팀 차원에서도 시의적절한 인력 충원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을 쏟고 있다. 류한경 AD는 “지원 부서를 비롯해 회사의 많은 분이 아트팀이 높은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여러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퀄리티를 최우선으로 하는 비주얼아트실의 작업 방식을 보여주는 팀 중 하나가 콘티팀이다. 콘티팀은 기획과 캐릭터 설정 등을 바탕으로 게임 내 구현될 비주얼의 밑바탕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청사진, 가이드 역할만 하는 셈이다. 그러나 에픽세븐 콘티팀의 작업물을 보면 얼핏 최종 콘티가 아니라 최종 결과물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콘티 작업에만 5주를 배정할 정도다. 오직 콘티 작업을 위해 게임에는 쓰이지 않는 3D 모델링 작업까지 이뤄진다.
이렇게 콘티 작업부터 완성도에 공을 들이는 이유에 대해 류한경 AD는 “콘티 완성도가 높을수록 그만큼 최종 결과물의 완성도도 높아지기 때문”이라며 “콘티 완성도가 100이면, 후반 작업팀들이 거기에 10, 20만 더 얹어도 결과물의 완성도가 110, 120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류한경 AD는 후반 작업을 하는 팀들도 콘티팀 못지않은 꼼꼼함과 세심함을 갖췄다고 강조한다. 가령 게임 내 스킬 연출 등을 담당하는 컷인 애니메이션팀은 스킬 연출 하나를 위해 1초당 30장의 프레임을 그리는 데 모든 프레임을 꼼꼼히 확인하고 공을 들여 다듬는다. 약 5초 정도의 스킬 연출에만 150장 이상의 프레임이 들어가니 결코 적지 않은 작업량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경험’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고 류한경 AD는 설명한다.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비주얼아트실에서는 구성원 각자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류한경 AD는 “모든 걸 작업자의 니즈에 맞춰 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맡게 됐을 때 가장 능력이 잘 발휘된다”고 말한다. 에픽세븐이 일본 애니메이션풍 아트 스타일을 지니게 된 것도 처음부터 ‘서브컬쳐 게임’을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그런 콘텐츠를 즐기는 구성원들의 취향과 니즈가 자연스레 반영된 결과라는 후문이다.
에픽세븐은 어느덧 서비스 6년 차를 맞고 있다. 수명이 짧은 모바일 게임 업계에서는 나름 장수 게임이라 할 만한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그만큼 비주얼아트실의 어깨도 무거워졌다. 에픽세븐의 그래픽에 여전히 좋은 평가를 해주는 이용자들도 많지만, 내부에서는 최신 게임들과 견주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퀄리티를 높여야 한다는 의무감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류한경 AD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퀄리티를 높여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다”면서 “새로운 툴 도입, 해상도 개선 등 비주얼을 보강하기 위한 내부적 노력이나 연구개발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3D로 2D풍 그래픽을 재현하는 기법이 크게 발전했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2D 그래픽의 퀄리티나 작업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류한경 AD는 이처럼 빠르게 발전하는 그래픽 기술 트렌드에 대한 연구개발도 꾸준히 이뤄지고 설명했다.
슈퍼크레이티브는 현재 준비 중인 차기작 또한 에픽세븐과 마찬가지로 장인의 손맛이 살아있는 2D 게임으로 방향을 정했다. 여전히 전통적인 2D 그래픽에 대한 수요가 남아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류한경 AD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보면 디즈니, 픽사 등 3D 애니메이션이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2D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완성도만 높다면 관객들 반응도 좋다”며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완성도 높은 2D 그래픽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퀄리티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그런 게임을 만드는 게 슈퍼크리에이티브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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