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격 50m 소총 복사에서 금메달을 딴 이은철(56)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정들었던 총을 내려놨다. 어릴 때부터 ‘사격왕’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이은철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시작으로 1988년 서울,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까지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5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다. 선수 생활 동안 올림픽 금메달 1개, 세계선수권 금메달 2개, 아시안게임 금메달 5개,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4개를 획득하며 ‘사격 그랜드슬램’도 달성했다.
2000년 홀연히 사격을 떠난 그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정보통신(IT) 분야가 그의 새 일터였다.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사격 유학을 떠난 그는 현지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했다. 고교 졸업 후엔 선수 생활을 이어가면서 미국 텍사스 루스런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게 사격이었다. 사격 다음으로 사랑했던 게 프로그램이었다. 한창 선수 생활을 할 때도 훈련을 마친 뒤 숙소에서 컴퓨터 책을 읽곤 했다”고 말했다.
2000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그는 한 통신장비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운도 따랐다. 그의 선수 시절 소속팀은 통신회사인 KT였는데 그 미국 회사는 그가 KT에서 오랫동안 기술자로 일한 걸로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배운 관련 지식도 있었기에 그는 무난히 미국 기업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몇 년 경력을 쌓은 뒤 그는 한국에 진출한 한 미국 벤처회사의 한국 지사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회사 매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능력을 발휘했다.
모든 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창업을 했다가 큰 성공과 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이후엔 다시 미국의 한 빅테이터 회사와 블록체인 회사의 한국 지사장을 연달아 맡아 재기에 성공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 연말 ‘두 번째 은퇴’를 했다. 그동안의 해 온 사업을 모두 접고 다시 사격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올해부터 대한사격연맹 경쟁력강화위원장을 맡고 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선수 및 코칭스태프 선발과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 향상 방안 등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 풍부한 현장 경험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는 국제사격연맹(ISSF)에서도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다. ISSF 소총위원회 위원인 그는 당장 9월 열리는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테크니컬 델리게이션(기술총괄)로 임명됐다. 내년 열리는 2024 파리 올림픽 때는 소총 심판으로 참가한다. 파리 올림픽 출전권이 결린 2023 바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심판위원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예전에도 ISSF로부터 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회사를 오래 비울 수 없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며 “앞으로 여러 대회에 참가하게 된 만큼 한국 선수들이 심판 판정 등으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다시 사격계로 복귀한 이유에 대해 “후배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세 번째 올림픽 출전이던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는 선수에서 은퇴하고 지도자로 변신해 후배들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사격계에서는 그를 대체할 선수가 거의 없었다. 연맹과 소속팀의 권유로 그는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올림픽 5회 출전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스스로는 전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사격 선수로서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운동선수가 갖춰야 할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내 마음속에 예전 같은 불꽃이 없는데 어린 선수들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런 그의 마음에 다시금 불꽃을 일으켜 세운 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었다. 그 때 소녀 가장으로 은메달을 따며 국민 여동생으로 등극했던 강초현의 존재가 그의 인생에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줬다. 그는 “당시 초현이가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사격을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딛고 선수 생활을 해나가는 초현이를 보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IT 관련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소년 소녀 가장을 돕는 재단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으로 정말 크게 성공했다면 이미 꿈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까진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재단을 만들고 싶은 꿈은 버리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봉사부터 시작하자는 생각으로 사격계에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따지고 보면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삶의 낙이 없어졌을 때 그런 생각들이 내가 다시 열심히 뛸 수 있는 원동력이 돼 줬다. 거꾸로 소년 소녀 가장들이 나를 살린 셈”이라고 했다.
각종 국제대회와 국내 대회를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가 체력을 유지하는 가벼운 등산이다. 선수 시절부터 유독 산을 좋아했다는 그는 사업가이던 작년까지는 집 근처이던 서울 강남구 대모산을 자주 다녔다. 최근 경기 용인으로 이사를 간 뒤엔 집 인근의 광교산을 오르곤 한다.
그는 선수 시절에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단골 훈련 코스이던 서울 태릉선수촌 인근 불암산을 자주 올라갔다. 그는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불암산 등반은 무척 힘든 훈련이었지만 사격 선수들은 지구력 강화를 위해 천천히 올라가곤 했다”며 “일주일에 세 번은 불암산에 가서 그 안에 있는 불암사에 들러 단전호흡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는 아직도 큰 흉터가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불암산 등산 때 생긴 ‘영광의 상처’다. 그는 “그날도 불암산을 오르려 했는데 비가 많이 내려 선수촌에서 문을 폐쇄했다.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야 했기에 철조망을 뛰어넘다가 걸려서 오른손을 크게 다쳤다. 그런데 그때도 피를 철철 흘리면서 불암산 정상을 밟고서야 다시 내려와서야 치료를 받았다. 아마 하늘이 그런 걸 가상히 여겨 올림픽 금메달을 주신 것 같다”며 웃었다.
선수로서 그의 사격 전성기는 1985년~1988년 즈음이었다. 1988년 한국에서 열린 서울 올림픽 금메달은 당연히 그의 차지인 것처럼 보였다. 당시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향해 탄산음료는 물론 커피도 입에 대지 않는 수도승 같은 생활을 했다. 그의 모든 생활은 사격에만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그 대회에서 그는 충격의 노메달에 그쳤다.
4년 뒤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정반대였다. 그 대회에서 그는 8명이 출전하는 결선에 꼴찌인 8위로 가까스로 진출한 뒤 역전 금메달이라는 반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모든 걸 쏟아부은 3년이 이후 10년의 영광을 준 것 같다”며 “지금도 후배들에게는 ‘3년만 모든 걸 포기하고 한 곳에 집중하면 어떤 일이든 성공할 수 있다’고 얘기해 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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