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재 개발속도 높이는 연구 플랫폼 만든 ‘버추얼랩’
컴퓨터로 물질 선별하고 특성 파악… 누구나 쓸 수 있게 ‘클라우드’로 개발
사용한 만큼만 지불해 비용도 아껴
“‘IT 잡무’ 덜어줘 R&D에 집중”… “신소재 개발 완전 자동화가 꿈”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는 신소재공학은 연금술에 비유된다. 결정구조나 특정 원소를 바꾸는 것으로 신소재를 만들어 낸다. 예컨대 흑연(연필심)으로 다이아몬드라는 신소재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둘은 탄소 원소로만 구성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원소로 돼 있지만 결정구조가 달라지면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결정구조를 다르게 하려면 실험실에서 압력이나 온도 등을 달리해 결합 방식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결합하는 것이 최선인지 알아내려면 실험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컴퓨터를 이용해 탄소의 결합방식을 다르게 구성해보고 그렇게 만들어진 재료가 어떤 특성을 보일지 미리 알 수 있다면 개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우주항공이나 배터리, 디스플레이, 반도체, 정보통신, 생체재료 산업 같은 첨단 산업에서 새로운 소재의 개발은 필수적이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차세대 성장산업 육성은 신소재 개발이라는 기초가 튼튼해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예컨대 첨단 배터리 양극재를 개발할 때 양극재의 대표적인 후보물질인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간, 알루미늄 등의 비율을 달리해 제조하는 것만으로도 배터리의 특성이 크게 개선될 수 있다. 사실상 누가 먼저 찾아 만들어 내느냐는 게임인 것이다.
서울 성동구에 있는 버추얼랩(대표이사 이민호)은 신소재를 개발하는 연구자들이 새로운 소재를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시뮬레이션 플랫폼 ‘머티리얼스 스퀘어’를 만든 스타트업이다. 현재 미국 등 100여 개국, 1만8000명의 연구자가 이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버추얼랩 본사에서 만난 이민호 대표이사(38)는 “신소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물리나 화학 분야에 정통한 경우가 많지만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다룰 줄 아는 경우는 드물다”며 “연구자들이 신소재를 찾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뮬레이션 방식을 웹을 통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
● 컴퓨터로 최적의 소재 찾는다
회사명 버추얼랩은 ‘가상 실험실’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실험이나 제조를 하기 전에 물리법칙으로 미리 실험을 모의해 보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당시 전구의 필라멘트 재료를 발견할 때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재료로 직접 실험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은 그런 방식으로 하기에는 신소재공학 분야의 개발 규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기예보도 일종의 가상 실험의 결과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예보관들은 수치예보라고 불리는 컴퓨터 날씨 시뮬레이션 모델의 결과를 참고해 예보를 낸다. 수치예보 모델은 유체의 흐름을 묘사한 편미분 방정식인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을 컴퓨터로 풀어내는 알고리즘이다. 편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는 계산 자원이 많이 필요해 슈퍼컴퓨터급의 고성능 컴퓨터가 주로 쓰인다.
신소재공학에서 어떤 물질의 특성을 알려면 양자역학의 기본 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전자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계산해 물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역시 고성능의 컴퓨터가 필요하다. 이 대표는 “기존에는 신소재공학 연구실에서 컴퓨터 신물질의 특성을 시뮬레이션해보려면 고성능의 컴퓨터를 마련해야 했고, 또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여러 방정식을 풀어주는 소프트웨어를 별도로 구입해야 했다”며 “기본적으로 수천만∼수억 원의 예산이 필요했던 것이라 엄두를 내기 힘들었지만, 우리 플랫폼 ‘머티리얼스 스퀘어’를 활용하면 자신의 노트북컴퓨터로 웹을 통해 사용시간만큼만 비용을 지불하면 된다”고 했다.
머티리얼스 스퀘어를 활용하면 기존 물질의 특정 원자를 다른 원자로 교체하거나, 결합 방식을 변경하는 것이 간단한 입력만으로 해결된다. 원격 컴퓨팅 서비스인 클라우드 서비스로 구현돼 있어 컴퓨팅 자원이나 저장공간도 자신의 연구 방향에 맞춰 일시적으로 늘리거나 줄이는 등의 조절이 가능하다. 연구자들은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서버에 맞춰 최적화할 필요도 없고, 시뮬레이션 결과를 분석하는 수고도 덜 수 있어 소재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비싸고 사용하기 어렵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커피 한잔 즐기듯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소재 연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셈이다.
● 대학원 동료들의 시뮬레이션 도와주다 창업
이 대표는 고성능컴퓨팅(HPC)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한양대 대학원 신소재공학과에 진학했다. 크고 복잡한 계산을 최적화하는 일 대신 신소재공학을 공부한 뒤 대기업에 취직해 연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학원에서 창업으로 진로가 바뀌게 된다.
당시 그의 연구실에서는 별도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구입해 유닉스나 리눅스 계열의 운영체제(OS)를 쓰는 고성능의 컴퓨터에 깔아 쓰고 있었다. 이 대표는 “신소재 개발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인데, 동료들이 리눅스 운영체제가 익숙지 않아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구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며 “소프트웨어를 제작할 능력이 있었던 덕에 동료들을 위해 윈도 프로그램처럼 입력값만 넣으면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기반 프로그램을 만들어 칭찬과 박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는 동료들과 교수들의 높은 평가에 고무됐다. 이후 신소재공학 연구자들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더 많이 보였다. 석사 학위를 받고 2014년경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입사해 다양한 소재 연구를 위한 여러 개발 플랫폼을 만들었다. 리튬이온 배터리와 반도체 등의 소재 플랫폼 개발에 핵심 인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KIST에 있으면서 연구자들의 다양한 수요, 연구 패턴 등에 대한 지식을 축적했다.
버추얼랩에는 전략책임자를 맡고 있는 박민규 부사장(KIST 박사후과정), 기업 고객 컨설팅 책임자인 김영광 수석 컨설턴트(포항공대 박사), 고객성공팀을 이끄는 류정아 리더(세종대 박사) 등 물리학과 신소재공학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시뮬레이션 진화의 최종 목표는 ‘소재 개발 자동화’
버추얼랩이 만든 신소재 개발 플랫폼은 진화를 거듭해 오고 있다. 2017년 무기재료(Inorganic material) 시뮬레이션 플랫폼으로 시작해, 2021년에는 유기재료와 고분자 신소재 시뮬레이션이 추가됐다. 연구 교육용 플랫폼도 이 시기에 출시했다. 2022년에는 에너지소재 연구개발 플랫폼으로 확장됐고, 기업에 연구개발 플랫폼을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전기화학 촉매 연구설계에 특화된 ‘카탈리틱’ 서비스도 선보였다.
올해에는 ‘D3스퀘어’라는 데이터 기반 신소재 개발 플랫폼을 선보였다. 기존 개별 연구실에서 가지고 있던 신소재 개발 데이터를 인공지능(AI)에 학습시켜 성공 가능성이 높은 신소재를 빨리 선별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연구자는 최소한의 시도로 원하는 물성을 지닌 합금 조합 비율을 AI의 도움으로 만들 수 있다. 소재 산업에 있는 중소·중견기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버추얼랩 측은 기대하고 있다.
버추얼랩이 개발해 서비스하는 기술들은 첨단 산업의 성장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정부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버추얼랩의 기술들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하고 있다. 이 대표는 “필요한 물성을 갖춘 소재를 최소한의 시도로 찾아낸 뒤, 이를 로봇이 자동으로 배합하고 제조해 검증까지 마치는 신소재 개발의 완전 자동화를 이끄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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