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 잘 수 있는 주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30~40km 산을 달려요. 집에 올 때면 다리가 무거워 터덜터덜 걸어오죠. 그런데 그 묵직한 다리만큼 제 머리가 맑게 채워졌다는 기분이 들죠. 달리고 나면 풀리지 않는 난제도 풀리죠. 4년 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죠.”
인천시립합창단 메조소프라노 송지영 씨(45)는 요즘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주 놀란다고 한다. 단 100m도 걷기 싫어 차를 타고 다니던 그가 이젠 산을 50km나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어느 날이었죠. 퇴근한 뒤 집 근처 서울 도림천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무작정 나가 걸었어요.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심했죠. 한 7~8km를 걸었죠. 돌아오면서는 살살 걷듯이 달려봤어요. 단 100m도 걷기 싫어하던 제가 달리다니…. 숨은 차지만 땀을 흠뻑 흘리고 났을 때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어요.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모든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고, 기분이 상쾌했어요.”
그때부터 걷다가 500m, 1km를 달렸다. 송 씨는 “계속 거리를 조금씩 늘려갔다. 참고 더 잘 달려보자고 달리니 어느 순간 ‘아 이 기분 뭐지?’ 힘은 드는데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내가 무슨 고민을 했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스트레스도 날아갔다”고 했다. 2019년 가을, 마라톤 10km를 완주했다. 1시간 15분.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됐지만 달리기를 멈추진 않았다. 그는 “혼자서 10km를 달릴 수 있게 되자 마라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혼자서 마스크 쓰고 달리며 여기저기 찾아보니 크루(동아리)도 있고 마라톤 교실도 있었다. 그 무렵 오래전 만났던 오세진 작가(43)에게 연락해 함께 운동하자고 했다. 오 작가는 교통사고로 무너진 몸을 운동으로 일으켜 세운 뒤 마라톤, 트레일러닝, 등산에 빠져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송 씨는 오 작가와 산을 찾으며 여자마라톤 국가대표 출신 권은주 프리랜서 감독(46)도 만났다. 그때 “마라톤 선수 출신 김용택 감독이 지도하는 바나나스포츠클럽에서 배우려 한다”고 하자 권 감독이 “아주 좋은 결정”이라고 해 본격적으로 배우며 달리게 됐다.
“매주 토요일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훈련받았죠. 처음엔 레슨 받고 혼자서는 주중에 한 번 달리는 식으로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래서는 마라톤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당 2번, 3번으로 늘렸죠. 지금은 거의 매일 달리고 있습니다.” 온·오프라인 마라톤 동호회 휴먼레이스에도 가입했다. 송 씨는 “오 작가와 산을 찾으면서 ‘산도 달리는 구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휴먼레이스 회원 한 분이 트레일러닝 번개 모임을 소집하기에 참가하면서 산을 달리게 됐다”고 했다.
서울 관악산 인왕산 북악산을 달렸다. 수도권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도 달렸다. 산을 달리는 게 너무 재밌었다. 그는 “풍광도 좋지만 냄새가 달랐다. 흙냄새, 나무 냄새…. 그리고 공기도 달랐다. 산을 달리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고 했다. 지리산과 설악산, 소백산 등 대한민국 명산도 올랐다. 트레일러닝 훈련으로는 서울 및 수도권 산을 몇 개 연결해 30km 정도 달렸다.
송 씨는 달리면서 “왜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하는지를 알았다”고 했다. “장시간의 싸움이라서기 보다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마라톤 완주는 자신의 주제를 알고 준비해야 하죠. 최소한의 준비 루틴이 있죠. 그것을 안 하면 완주를 못하죠. 또 오버하면 중도에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준비 잘하고 집중력을 놓지 않고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운을 자신에서 심어주면서 달려야 완주할 수 있죠. 인생도 마찬가지잖아요.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고난이 찾아오죠. 그 점이 인생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코로나19 확산으로 도로마라톤은 멈췄지만 산에서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는 계속 이어졌다. 2021년 10월 서울을 한 바퀴 달리는 서울국제울트라트레일러닝 ‘서울 100K’에서 50km를 12시간에 완주했다. 그리고 2주 뒤 제주에서 열린 트렌스제주트레일러닝 50km를 10시간에 달렸다.
“산과 도로를 달리는 게 너무 즐거웠죠. 어느 순간 나만을 위해 달리는 것 같아서 남을 위해 달리는 것을 고민했어요. 우리 집 근처에 살던 친구가 시각장애인 마라톤 동반주자(라이드러너)를 했던 게 생각나 연락했죠. 그래서 VMK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을 알게 됐죠. 시각장애인은 동반주자가 없으면 달릴 수 없잖아요. 달리면서 남을 도울 수 있어 좋았어요.” 시각장애인과 함께 달리는 빛나눔동반주자단으로 활동했다. 시간 날 때 시각장애인과 10~20km를 함께 달렸다. 그는 “지난해는 시각장애인들과 달린 해”라고 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과 달리면 내가 더 실력을 키워야 더 잘 끌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자극 받는다”고 했다.
송 씨는 이제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몸이 찝찝해 견디지 못한다. 새벽에 5~10km를 달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새벽에 달리지 못하면 저녁에라도 달려야 한다. 주말에는 산을 달린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서 도로 대회에도 출전했다. 주로 10km와 하프코스를 달렸다. 10km는 48분, 하프는 1시간46분이 최고기록. 그는 “가끔 입상도 했다. 속칭 빈집털이(강자가 없을 때 우승했다는 속어)다”고 했다. 42.195km 풀코스는 지난해 가을 처음 달렸다. 3시간56분. 11월 5일 jtbc마라톤에서 3시간45분을 목표로 달릴 예정이다.
송 씨는 달리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저는 새하얀 피부에 바짝 마른 몸이었죠. 먹는 것도 살찔까 봐 새 모이 먹듯 했죠. 지금은 햇볕에 탄 구릿빛 피부가 아름답고 국수 한 그릇도 뚝딱이죠. 우리 단원들이 이런 저를 보고 놀랐죠. 달리며 굵어진 제 허벅다리도 자랑스러워요. 달리면서 제 인생관이 확 바뀌었습니다.” 송 씨는 “과거 지나친 승부욕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이젠 ‘내 페이스대로 가면 되지 뭔 걱정?’이란 생각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달리며 체력이 좋아진 것은 물론 마음의 여유까지 찾았다.
“처음엔 다른 사람이 빨리 달리면 ‘어쩌지?’란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죠. 그런데 이젠 ‘괜찮아 저 사람은 저런 세상에 사는 거고 난 내 세상에서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따라갈 수도 없잖아요. ‘내 페이스가 있잖아’라고 내려놓고 달리니 마음이 너무 편해요.” 그는 강조했다. “달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달리면 매일 뇌 청소를 하는 느낌입니다. 세포들이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옆 사람도 돌봐줄 줄 아는 여유도 생깁니다. 주위에 달리라고 하면 ‘야 나 죽으라고?’라는 반응입니다. 저도 걷다가 100m부터 차근차근 달렸습니다. 마라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젠 마라톤 전도사가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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