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한국 프로야구에는 세 명의 신(神)들이 그라운드를 호령했다. ‘양신’ 양준혁과 ‘종범신’ 이종범, 그리고 ‘민한신’ 손민한이었다. 야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세 사람은 팬들 사이에서 ‘야구의 신’ 대접을 받았다.
셋 중 유일한 투수였던 손민한은 ‘전국구 에이스’였다. 소속팀 롯데는 거의 매년 하위권을 맴돌았지만 손민한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좋은 투수였다. 연패를 거듭하던 롯데는 손민한이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만 1승을 거두고 다시 연패에 빠지곤 했다.
2005년 손민한은 18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빼어난 성적으로 다승과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그해에도 롯데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는데 손민한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가을 잔치’에 나가지 못한 팀 출신의 MVP가 됐다. 손민한은 “1년 다 같이 고생하고 혼자 상을 받은 게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모든 야구 선수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상이지만 내게는 동시에 슬픈 상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올해 LG 트윈스가 2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롯데는 프로야구 10개 팀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우승하지 못한 팀으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롯데의 마지막 우승은 1992년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지속된 암흑기 속에서 손민한의 피칭만이 롯데 팬들의 답답한 마음을 씻어주곤 했다.
손민한은 공을 쉽게 던지는 투수였다. 상대 타자를 윽박지르는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지만 공격적인 투구로 경기를 주도했다. 이는 투구에 대한 손민한의 접근법에서 기인한다. 그는 “투구는 100% 타이밍이다. 아무리 공이 빨라도 정타를 맞으면 점수를 준다. 나는 어디까지나 방망이 중심에만 맞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공을 던졌다”고 했다.
그에겐 강민호(현 삼성)라는 훌륭한 파트너가 있었다. 강민호 역시 공격적인 볼 배합으로 경기를 빠르게 이끌어가는 포수였다. 손민한은 “많은 포수들이 타자가 못 치게끔 사인을 낸다. 하지만 나도 민호도 타자가 방망이를 내게 만들자는 주의였다. 다만 정확하게만 맞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두려움 없는 투구로 그는 롯데와 NC에서 뛰며 123승을 거뒀다.
하지만 항상 당당했던 손민한도 마운드 위에서 쫄았던 경험이 있다. 2006년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미국과의 대결이었다. 당시 미국은 알렉스 로드리게스, 켄 그리피 주니어, 데릭 지터 등 최고의 선수들로 ‘드림팀’을 꾸렸다.
지금도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명장면 중 하나는 손민한인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였던 로드리게스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낸 것이다. 손민한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로드리게스가 타석에 들어서자 타석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덩치도 좋지, 방망이도 길지, 어디에 던져도 다 칠 것만 같았다. 잘못하면 타구가 나한테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망가는’ 피칭을 했다. 패스트볼이 아닌 바깥쪽으로 빠지는 체인지업을 세 개 연속 던진 것이다. 만만한 공으로 여겼던 로드리게스는 세 번 연속 크게 헛스윙을 하면서 삼구삼진을 당했다. 손민한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평생의 자랑이다. 당시 미국팀에 스타플레이어가 얼마나 많았던지 한국 선수들은 경기에서 이기자마자 단체로 미국 팀 라커룸으로 달려가 사인을 받았다”며 웃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손민한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마흔의 나이에 NC에서 11승을 거둔 뒤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후 NC 투수 코치를 맡으며 2020년에는 난생 처음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춰보기도 했다. 그는 “선수 때 우승했다면 더 기뻤겠지만 현장에서 우승이란 걸 경험하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당시는 코로나 유행기라 많은 관중들 앞에서 우승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그래도 내 야구 인생의 유일한 우승인 것으로 만족한다. 우승 반지는 가보로 잘 모셔두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그는 부산에 위치한 부경고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NC 시절 함께 코치로 일했던 채종범 감독의 권유에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하는 건 그에겐 즐거움이자 새로운 도전이다. 부경고는 올해 전국대회에서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착실히 선수들을 키워 ‘언더독의 반란’을 일으켜 보는 게 그의 목표다. 손민한은 “어떤 일이든 즐거워야 한다. 학생 야구는 더더욱 즐거워야 한다. 프로든 아마든 지도자라면 무엇보다 선수들이 마음껏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맞다”며 “현재는 우리 팀 선수층이 두텁지 않아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기본기를 충실이 쌓아 올리다 보면 내후년쯤에는 누구도 무시못할 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부터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걸 좋아했다. NC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그는 구단 및 경남 교육청과 함께 3년간 ‘손민한과 놀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경남 지역 내 초중고교들 돌며 아이들과 야구로 놀아주는 행사였다. 그는 “도내 곳곳 안 가본 데가 없다. 정식 코치가 되면서 그만두게 됐지만 하는 내내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학생 지도자가 되면서 그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프로 선수와 코치 때는 식사와 수면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삼시세끼를 착실히 챙겨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원래부터 먹는 데 대한 욕심에 크게 없었던 그는 선수 시절 먹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아마추어 때는 조금이라도 더 몸을 키우기 위해, 프로 선수 때는 더 힘을 쓰기 위해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먹어야 했다. 지금은 자신의 양만큼만 먹어도 되니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서 왜 이렇게 적게 먹느냐고 할 정도로 양이 적은 편이다. 속이 더부룩한 느낌을 좋아하지 않는다. 체질적으로 소식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건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이다. 저녁 훈련 전 급식으로 저녁을 먹는다는 그는 “칼로리가 충분하고 신선한 야채도 많이 나온다. 학생들은 크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내겐 급식이 최고의 식사”라며 웃었다. 그는 여전히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뛰고, 공을 던진다.
한 때 낚시를 좋아했던 그는 요즘엔 취미로 당구를 즐긴다. 지인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두 차례 스리쿠션(삼구) 당구를 친다. 그는 “크지 않은 사각 당구대 안에 무궁무진한 수가 있다. 공을 맞힐 수 있는 수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게 매력이다. 당구는 칠 때마다 즐겁고 새롭다”며 “함께 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많이 나눈다. 인생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고 말했다.
몇해 전에는 부산에서 열린 아마추어 대회에도 출전한 적이 있다. 야구에선 ‘천하의 손민한’이었지만 당구 대회에선 1회전에서 탈락했다. 그는 “한국시리즈보다 더 떨었던 것 같다.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제대로 한 번 쳐보지도 못하고 바로 떨어졌다. 그날 이후 대회엔 나가지 않고 있다”며 했다.
손민한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소중하다”며 “현재는 아마추어 지도자로 선수들을 잘 키우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프로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롯데의 암흑기를 홀로 지탱했던 그는 야구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했던 롯데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는 “더 좋은 팀에 있는 게 좋지 않았겠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롯데는 내게 기회의 팀이었다. 암흑기 시절에도 힘들다기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훨씬 컸다”며 “‘명장’인 김태형 감독님이 오셨으니 내년에 롯데는 훨씬 좋은 팀이 될 것이다. 1년 정도 감독님의 야구 색깔을 입힌 뒤 내후년쯤에는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도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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