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목이건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의 훈련량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동료 선수들조차 안쓰럽게 쳐다보는 종목이 하나 있다. 바로 레슬링이다. 레슬링 선수들은 쉴 새 없이 뛰고, 구르고, 기구를 들고, 상대를 메친다. 태릉선수촌 시절 레슬링은 가장 먼저 운동을 시작해 가장 늦게 끝나는 종목이었다.
안 그래도 힘든 레슬링 선수들을 더 괴롭히는 건 ‘체중 조절’이다. 힘을 쓸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 그런데 체중 종목인 레슬링은 잘 먹으면서도 자기 체급의 체중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박장순 삼성생명 감독(55)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체중 조절을 잘 이용해 한국 격투기 종목 선수로는 유일하게 올림픽 3개 대회 연속 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박 감독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레슬링 남자 자유형 68kg급에서 은메달을 땄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선 74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같은 종목 은메달을 수확했다. 레슬링 그랜드슬램(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달성한 그는 2016년 세계레슬링연맹(UWW)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어린 시절 그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원래 씨름 선수였지만 몸집이 작아 레슬링으로 전향했다. 대전체고를 졸업한 그는 경량급인 56kg급 선수로 한국체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오니 피자, 치킨 등을 평소 보지 못했던 음식들이 차고 넘쳤다. 박 감독은 “얼마나 맛있는 게 많던지 밥을 세 공기씩 먹었다. 몸무게가 10kg 이상 늘고, 키도 10cm이상 컸다. 잠자고 있던 몸속의 힘이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엔 68kg급으로 출전했다. 당시 그는 앞만 보고 뛰었다. 대회 전 어느 날 선수촌에서 그는 러닝으로 몸을 풀고 있는데 옆에 한 흑인 선수가 같이 뛰고 있더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수는 당대 최고의 육상 스타 칼 루이스(미국)였다. 그는 “사실 올림픽이 그렇게 큰 대회인 줄 몰랐다. 칼 루이스가 누군지도 몰랐다. 매트 위에선 상대 선수가 누구든 힘과 패기로 밀어붙였다”고 했다.
은메달을 딴 후 그는 남자 74kg급 경기를 보러 갔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화려한 기술로 매트를 평정하던 케네스 먼데이(미국)가 금메달을 따는 걸 눈앞에서 본 것이다. 마음 속에선 “저 선수와 한번 붙어보고 싶다”는 불길이 솟아올랐다.
당장 74kg으로 체급을 올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체급을 올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1990년 초 열린 유럽 투어였다.
첫 대회가 열린 러시아에서 그는 체중 조절에 애를 먹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이 빠지지 않았다. 절망한 그는 화장실에서 자신의 코를 주먹으로 때려 코피를 냈다. 그렇게 단 1g이라도 줄여보려 한 것이다. 이 모습을 본 당시 코치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그냥 운동장을 뛰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 시베리아는 밤에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흐르는 쌍코피를 휴지로 틀어막고 운동장을 뛰고 또 뛰었다. 그만큼 간절했고, 그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어떻게든 체중을 맞춘 그는 그 대회 금메달을 땄다. 우승을 한 건 좋았지만 1m도 넘는 대형 트로피를 받은 게 또 다른 문제였다. 이후 프랑스와 터키, 미국 등을 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동을 거듭할 때마다 트로피는 한두 군데씩 부서지기 시작했고, 한국에 오기 전 그는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트로피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베이징 아시아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그는 체급을 74kg급으로 올렸다.
74kg급에서 만난 ‘우상’ 케네스 먼데이와의 대결은 연전연패였다. 첫 만남에서 폴로 패했다. 이후에도 좀처럼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고무적이었던 건 맞대결이 거듭될수록 점수 차가 좁혀졌다는 거였다. 5번째 대결에서는 팽팽한 대결 끝에 연장전에서 패했다.
그는 오기가 생겼다. 먼데이를 이기기 위해 바르셀로나 올림픽 3개월 전부터는 친구도 만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으며 수도승처럼 살았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그는 운명처럼 올림픽 결승에서 먼데이를 다시 만났다. 그가 세운 작전은 ‘버티기’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경기 종료 15초를 남기고 그는 태클을 시도해 먼데이를 쓰러뜨렸다. 1-0 승리였다. 5전 6기 끝에 꿈을 이룬 순간이었다. 박 감독은 “여전히 먼데이를 존경한다. 먼데이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나도 있을 수 있었다”며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내 인생을 바꿔준 선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감독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같은 종목에서 은메달을 따고 은퇴한 후 국가대표 트레이너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삼성생명 레슬링단 감독이 됐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선 국가대표 감독을 맡기도 했다.
74kg급 선수로 은퇴한 그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74kg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 지도하는 선수들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함께 훈련한다. 그는 “순간 스피드만큼은 지금도 자신 있다. 스피드가 있으면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도 경기를 주도해 나갈 수 있다”며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이려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체중이 더 늘지 않게 몸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타고난 장사였던 박 감독은 선수 시절 레슬링 선수들이 많이 하는 ‘줄 타고 오르기’의 장인이었다. 11m 높이의 줄을 한 번에 10번씩 오르내렸다.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아 15kg 원반을 발에 매고 줄타기를 하기도 했다. 그는 “나뿐 아니라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라면 대부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을 탔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가 잘하지 못했던 건 달리기였다. 당시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선수들은 불암산 정상까지 뛰어오르곤 했는데 그는 레슬링 선수 중 꼴찌를 도맡아 했다.
다시는 쳐다보지도 싫을 것 같지만 그는 요즘도 가끔 집이 있는 남양주 별내에서 불암산까지 등산을 하곤 한다. 그는 “선수 때는 불암산 산신령님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서 운동을 했다. 요즘도 가끔 불암산 등산을 하며 불암사에 들르곤 한다”고 했다.
쉬는 날엔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곤 한다. 최근에도 강원도 강릉과 양양을 다녀왔다. 그는 “평일에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한 뒤 휴일에는 마음을 비우고 재충전을 한다”며 “선수들에게도 운동할 때는 최선을 다하고, 쉴 때는 화끈하게 쉬고 오라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복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성별과 나이를 떠나 복근에 힘이 떨어지면 몸 전체가 처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굳이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기구를 들며 복근 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 집에서 소파 위에서나 방석을 깔고 앉아 엉덩이를 붙인 채 발을 반복해서 들어 올리는 가벼운 동작으로도 충분하다”며 “TV를 볼 때든, 쉴 때든 이렇게 한 달 만 꾸준히 하면 복근을 통해 에너지가 생기고, 굽어 있던 어깨가 펴지는 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바닥에 엎드린 채로 양손과 양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도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아주 좋다”고 덧붙였다.
20년 가까이 삼성생명 감독을 맡고있는 그는 침체에 빠진 한국 레슬링 자유형의 미래를 여자 레슬링에서 찾고 있다. 삼성생명은 2021년 여자 자유형 레슬링팀을 창단했고, 소속 선수 천미란이 4월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여자 자유형 50㎏급에서 동메달을 따는 등 성과를 내고 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4위에 오른 천미란은 내년 파리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박장순은 “일본은 여자 레슬링 강국이다. 우리도 못할 게 없다. 좋은 선수들을 잘 키워 새로운 메달밭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 같은 지도자가 되려는 그의 인생 최종 목표는 선수촌장이다. 대한체육회 이사도 맡고 있는 그는 “선수로서, 또 지도자로서 행복한 인생을 보냈다. 언젠가는 선수촌장으로 내가 살아온 인생과 노하우를 후배 선수들과 함께 나누는 꿈을 꾼다. 그날을 위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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