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다람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김광수 프로야구 롯데 코치(64)는 홈런을 많이 치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율이 아주 높지도 않았다. OB 베어스(현 두산)에서 뛴 11시즌 동안 통산 홈런은 27개였고, 통산 타율 역시 0.249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역 유니폼을 입고 있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팀 내 최고 연봉을 받았다. 방망이는 약했지만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탄탄한 수비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주루, 그리고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신장(165cm)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92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도자로 변신한 후에도 그는 묵묵히 현장을 지켰다. 1993년 OB 수비코치를 시작으로 고양 원더스 수석코치,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등을 지냈다.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명장들인 김인식 전 감독, 김경문 전 감독, 김성근 전 감독 등 ‘3김(金)’을 모두 보좌했다.
국제대회에도 여러 차례 나서 한국 야구의 영광을 함께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김경문 전 감독을 도와 한국의 9전 전승 금메달에 힘을 보탰다. 이승엽, 이대호 등이 결정적인 홈런을 치고 들어올 때 3루 주루코치로 하이파이브를 나눈 게 바로 그였다. 2015년 프리미어12때는 김인식 전 감독과 함께 초대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그리고 10월 말 그는 이번엔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 빛나는 김태형 롯데 신임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2017년 한화 이후 6년 만의 그라운드 복귀다. 그는 내년 시즌 김 감독을 보필해 롯데의 부활을 돕게 된다. 보직은 선수단의 분위기를 추스르고, 김 감독에게 조언을 하는 역할의 벤치코치다. 그는 “감독님이 전화로 ‘같이 한 번 해보시죠’라고 제안을 해 주셨다. 현장에 복귀하게 돼 너무 행복하다. 내가 그동안 인생을 나쁘게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롯데의 야구를 하나로 만드는 게 내 임무다.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김 감독에게 김 코치는 8년 선배다. 1995년 두산의 우승 때 김태형 감독은 포수 마스크를 쓴 선수, 김광수 코치는 수비코치였다. 하지만 김 감독은 팀내 소통을 위해 선뜻 먼저 손을 내밀었다. 김 감독은 “감독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못 보는 부분을 누군가는 볼 수 있어야 팀이 강해진다”고 김 코치 영입 배경을 설명했다.
1982년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김 코치는 내년에 65세가 된다. 1993년 처음 코치 생활을 시작했으니 내년엔 코치로서 보낸 시간도 30년이 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그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일구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꾸준히 야구와의 끈을 이어왔다. 종종 야구장을 찾아 경기를 보며 선수들이 예전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경기의 흐름은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를 관찰했다.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등을 찾아 아마선수들의 모습도 지켜봤다. 모교인 선린인터넷고에서 인스트럭터를 맡기도 했다.
그는 예전부터 어린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친화력이 좋은 코치였다. 이제는 손자뻘의 어린 선수들과 함께 땀을 흘려야 한다. 그는 “운동장에서는 즐겁고 행복하게 운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도 함께 얻어야 한다”며 “우리는 프로다. 프로라면 어느 정도 고통이 따르는 건 당연하다. 준비한 과정이 혹독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평소 자신의 지론을 밝혔다.
돌이켜보면 그가 수비 하나만큼은 당대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혹독한 과정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상하관계가 엄격하던 중학생 시절 그는 한 1년 선배의 수비 파트너였다. 그가 공을 던지면 그 선배가 공을 치는 훈련을 했는데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더란다. 그래서 그는 “제가 100개 연속 공을 받으면 끝내는 걸로 하자”라고 먼저 제안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훈련을 끝내기 위해 그는 집중력있게 수비를 했다. 그는 “하나라도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수비 연습을 많이 하게 됐다”고 했다.
고교 때는 ‘의도치 않게’ 배팅볼을 던지며 집중력을 키웠다. 당시 1학년들은 3학년에게 배팅볼을 던졌는데 당시엔 배팅볼 투수를 위한 보호망이 없었다고 한다. 방망이에 제대로 맞은 공은 곧바로 투수를 향해 날아오곤 했다. 그는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자칫하다간 한 방에 갈 수 있으니 어떻게든 공을 피해야 했다”며 “나중에는 몸쪽 깊은 쪽으로 공을 던지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렇게 던져야 강한 타구가 내 쪽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그런 게 송구 연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결정적인 건 프로 입단 후 김성근 감독을 만난 것이었다. 김 감독은 당시 OB 투수코치였지만 코치가 부족했던 당시엔 투수코치도 야수들에게 펑고를 쳐주곤 했다.
‘펑고의 달인’이라 불리던 김 감독은 한 번 방망이를 잡으면 쉽게 놓는 법이 없었다. 하루 1000개가 기본이었다. 점심 식사 후 시작하면 저녁 먹기 전까지 펑고를 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김 코치는 “하루에 1000개를 치는 사람도 대단하고, 그걸 받는 사람도 대단하다”며 “처음엔 공을 따라 몸이 움직였다. 그런데 하루 1000개씩 공을 받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며 웃었다.
그는 수비 뿐 아니라 주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은퇴 한 시즌 전인 1991년에 무려 50개의 도루를 했다. 마지막까지 경합 끝에 도루왕은 이순철(해태)에게 내줬지만 그해 도루 2위에 올랐다.
그런데 세간의 평가와 달리 그는 스스로는 준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실 내가 그렇게 발이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투수들의 습관이나 포수의 약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며 “나는 체구도 작고 힘도 떨어지는 선수였다. 대신 경기의 흐름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읽으려 노력했다”고 했다.
그렇게 평생 장점은 살리고, 모자라는 부분은 채우면서 살아온 그는 건강 관리에도 열심이다. 더구나 훈련 때나 경기 내내 서서 있어야 하는 ‘현역’ 코치로 한 시즌을 버티려면 강인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
경기나 훈련이 없는 날 그의 하루는 목욕으로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내 사우나에 가서 반신욕을 20분 가량 한 후 냉탕에서 몸을 식힌다. 이후 다시 사우나에서 20분가량 다시 땀을 낸 후 냉탕으로 마무리한다.
다리 근력은 가벼운 등산으로 유지한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서울이나 인근의 아차산과 청계산, 검단산 등을 오른다. 산에 가지 않을 때에는 집 주변에 있는 서울 올림픽공원 등을 한 두 시간 가량 걷는다.
그는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순발력과 스피드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리하는 만큼 노화를 늦출 수 있다”며 “어떻게든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 움직을 수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수시로 악력기를 이용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양손에 악력기를 들고 TV를 보곤 한다”며 “선수들에게 펑고를 쳐주려면 손아귀 힘이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펑고는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선수가 다리를 움직이게 쳐줘야 한다. 10cm 안팎의 차이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선수가 팔을 쫙 펴서 잡으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게 좋은 펑고다. 언제까지가 될 지 모르지만 나도 선수들과 함께 야구장에서 오래 재미를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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