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산악자전거(MTB)를 처음 봤어요. ‘내게 적합한 운동이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한 2년 지났을 때 친구가 자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으로부터 자전거를 사 왔는데 그게 MTB였죠. 제가 자주 빌려 탔고 결국 제 것이 됐죠. 제 자전거 인생의 시작입니다.”
김규만 굿모닝한의원 원장(66)은 1986년 처음 MTB를 접한 뒤 40년 가까이 자전거를 타며 전 세계도 누비고 있다. 올 설 연휴 때 자전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와 메디나를 순례했다. 이슬람의 성지를 다녀온 것이다. 지난해엔 가톨릭 성지 포르투갈 파티마와 스페인 산티아고를 질주했다.
“길 없는 길을 가는 게 MTB의 매력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도로로만 다니죠. 그런데 MTB는 길 없는 곳을 달릴 수 있죠. 과거 걸어서만 갈 수 있는 곳을 MTB를 타고는 갈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산을 달린다고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스포츠와는 사실상 담을 쌓고 지내던 김 원장은 26세 때 대학 산악부와 요트부에 들어가 요트 세일링, 윈드서핑, 암벽 빙벽 종주 등반 등을 즐기고 있었다. MTB는 오르막을 오를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오르가즘’을, 내리막을 바람을 가르며 내리막을 질주할 땐 즐거운 ‘내리가즘’을 줬다. MTB는 그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했다. 이후 새로운 자극을 주는 모험을 찾아다녔다. 행글라이딩으로 하늘을 날았고, 산악 스키와 급류 카약도 탔다. 1988년엔 몇 달 동안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MTB 1세대이자 해외 배낭여행도 1세대다.
산악회 선후배들이 에베레스트 등정 원정팀을 꾸린다는 소식에 합류해 1991년 네팔로 날아갔다. 그는 “당시 8000m까지만 올랐지만 내가 고소 적응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고산 등반 경험이 있는 사람들보다 짐도 잘 들고, 이동 속도도 빨랐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면서 네팔의 열악한 의료 환경을 절감했다. 1993년 한의사 4명이 모여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KOMSTA)’을 결성해 네팔을 찾았다. 초대 단장을 했고 지금까지 네팔, 중앙아시아 등 해외 오지를 다니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1994년 인도 최북단 히말라야산맥이 지나가는 고대 왕국 라다크를 MTB 타고 세 차례 횡단과 종단을 시도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발 3000~5000m 고개에 수없이 좌절했지만 비몽사몽, ‘고난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生於苦難, 死於安樂)’는 정신으로 약 800km를 달렸다. 이후 ‘세계의 지붕’ 티베트 고산지대 1800km를 종단했다.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4개의 거대 산맥을 지나야 하는 카라코룸 하이웨이 등도 MTB 두 바퀴로 달렸다.
100km 울트라마라톤과 철인3종 철인코스(수영 3.8㎞, 사이클 180㎞, 마라톤 42.195㎞)도 수차례 완주했다. 기록을 얘기하자 그는 “내게는 몇 시간에 완주했는지 기록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록은 어느 정도까지는 훈련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업과 다양한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완주했다는 것이 의미 있을 뿐”이라고 했다.
“고통(陰)이 극에 달하면 희열(陽)이 됩니다. 음극사양(陰極似陽), 마라톤에서는 러너스하이라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못 잊죠. 한의사가 참 답답한 직업입니다. 매일 진료 봐야 하는 쳇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나기 힘들죠. 뻔한 일상에서 재밌게 일탈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저를 끝까지 몰아붙여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입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오지에서 페달을 밟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후회하는 거죠. ‘내가 미쳤지’라며. 맛있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싶은데…. 가만히나 있을 걸 왜 사서 고생을 할까?라며.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쾌락을 느낍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고통도 중독이 됩니다. 마라톤 러너스 하이처럼 운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행복감이 발현됩니다. 모든 운동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어느 순간 즐거움으로 바뀝니다. 사람은 입에 단 약은 오래 먹을 수 없지만 쓴 약은 오래 먹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소금이나 소스만 따로 먹으면 짜고 독하지만 그것이 없이는 음식을 먹을 수 없죠. 우리 인생에서 고통은 소금이나 소스와 같은 겁니다. 삶이 재정비되고 활기차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원장은 책도 많이 썼다. 2010년 ‘괴짜 한의사의 진짜 MTB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펴낸 ‘올댓 MTB’라는 책은 MTB의 교과서로 통했다. ‘산띠아고에 태양은 떠오르고’, ‘지나간 길은 모두 그리워진다’, ‘마지막 남은 길은 더 아름답게 가라!-티베트 자전거 기행’ 등 다양한 책을 출간했다.
김 원장은 KOMSTA 의료봉사를 하며 자신이 직접 개발한 시술법을 시행하고 알려주고 있다. ‘소문침법’과 ‘골반교정 치료법’, 그리고 ‘올리브(All+Live) 건강법’이다. 김 원장은 조선 말기의 대학자로 ‘소문대요(素問大要)’를 펴낸 석곡 이규준의 제자 무위당 이원세를 스승으로 모시고 ‘소문학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사암침법을 소문대요의 이론에 맞게 진화시킨 ‘소문침법’을 창안했다. 그는 “소문침법이 단순하면서 효과가 직방인 침술”이라고 말한다.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기회만 되면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골반교정 치료법은 뼈와 관절과 근육에 대한 해부학을 기본으로 카이로프라틱, 추나 분야의 재야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배운 기술과 이론을 더하고 빼면서 완성했다. 그 핵심은 우리 몸의 중심인 골반이 틀어져서 만병이 생긴다는 거다. 그가 골반을 바로잡는 방법은 좀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요통, 관절통 같은 통증 환자를 눕혀놓고 엉덩이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들겨 팬다. 그렇게 해서 골반이 똑바로 자리 잡으면 척추가 바로 서고, 상체 하체의 균형이 잡혀 통증이 사라진다고 했다.
“이 치료법이 겉모습은 굉장히 폭력적이에요. 틀어진 뼈를 발로 막 차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죠. 그런데 그렇게 한 5분만 바로잡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골반이 똑바로 자리 잡으면 척추가 바로서고, 상체 하체 몸 전체의 균형이 잡힙니다.”
김 원장은 소문침법, 골반학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한의학적 경험과 건강법을 통칭해 ‘올리브 건강법’이라고 부른다. 올리브 ‘모두가 살고, 모두를 살린다’는 뜻으로 그가 작명했다. 걷기, 달리기, 눕기, 호흡법 등 언제 어디서든 생활 속에서 쉽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들을 담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워킹. 어깨와 골반을 반대 방향으로 교차시키면서 걸어야 골반이 바로 잡힌다고 한다. 이런 걷기법을 그는 올리브 워킹이라고 한다.
김 원장은 한때 차 없이 자전거와 두 발로만 다녔다. ‘화석 연료 태우면서 쾌속으로 달리는 것보다 좀 늦더라도 내 폐와 심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금은 차가 있지만 ‘마이카시대’에 가족들은 한동안 차 없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제가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박해를 많이 받았겠어요. 역시 대중의 시계에 맞추는 게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라. 차를 샀고 가족들도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낮 밤 가리지 않고 시간 날 때마다 자전거를 탄다. 상황에 따라 MTB와 로드 사이클, 미니벨로를 탄다. 한의원이 있는 서울 은평구 불광역에서 불광천을 타고 내려가서 한강을 따라 상류 하류로 달리다 보면 다양한 하천과 연결된다. 동네 인근 야산과 백련산, 안산, 북한산 등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가까운 거리는 두 발로, 더 먼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김 원장에게 자전거 타기는 숙고의 시간이다. 그는 “자전거는 여럿이 함께 달려도 사실 혼자 간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달리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반성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가 최근 종교에 상관없이 순례길을 많이 다니고 있는 이유다. 순례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걸었을까를 생각하며 달린다. 그는 “앞으로 10년은 더 자전거 해외 투어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1년에 한 번은 약 보름 한의원 문을 닫고 해외로 나간다. 그는 “자전거 타며 숱하게 넘어져 다쳤지만 다행히 관리를 잘해 아직은 몸이 탄탄하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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