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근로자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연금 개혁안을 발표했을 때 프랑스 국민 상당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걸 보면서 처음에는 일을 더 할 수 있게 해 준다는데 왜 반대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이후 프랑스가 연금을 후하게 주는 시스템이라는 걸 알게 되고서야 ‘나라도 반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연금 개혁 사례를 언급한 건 연금제도만큼이나 의료제도도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영국이나 캐나다처럼 의사가 공무원인 시스템에선 의사들이 “의사 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한다. 근무 시간이 일정하고 연봉도 의사마다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 수를 늘리면 하는 일은 줄어드는 반면에 소득에는 별 영향이 없다.
의대 증원 이슈가 불거진 후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한국의 의사 수가 정말 부족하냐’고 기자에게 질문했다. 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입지가 좋은 곳에 개원한 의사들은 하루에 외래 환자를 100명 이상 보는 곳이 많다. 심지어 250명씩 보기도 한다. 대부분은 가정의학과, 내과, 이비인후과 간판을 달고 감기 등 건강보험 환자 위주의 진료를 한다.
또 안과 의사도 눈병이 유행하면 하루 100명 이상의 환자를 본다. 대학병원 교수 대부분도 하루에 100명 넘는 환자를 진료한다. 선진국보다 10배가량 많은 진료량이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의사 수를 메워주는 것이다.
정부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대비 의사 수가 크게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같은 사례도 강조한다. 고령화 추세와 의사 고령화, 27년 동안 한 번도 증원할 수 없었던 ‘의사 카르텔’ 문제도 의대 입학정원 확대의 근거로 거론한다.
그런데 소아과나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분야에서 의사가 부족한 건 저출산과 함께 의사들 사이에서 의료사고 시 형사처벌 가능성, 저수가 문제 등이 부각되면서 인기가 줄어든 영향이 크다. 통증치료 및 피부미용 분야에서 수익이 크게 늘어난 것도 필수과 포기에 영향을 줬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의 경우 최근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병원 이탈로 의사 수가 부족해졌음에도 과거보다 크게 악화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비상의료체계 전환으로 중증·응급 환자만 대학병원 응급실을 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응급실 문턱이 낮다 보니 경증 환자들이 많이 찾았고, 일부 환자는 검사를 빨리 받거나 입원을 빨리 하기 위해 응급실을 찾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사례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응급의학 시스템도 더 정밀하게 바뀌었다. 의료 시스템만 바뀌어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정부는 세 논문을 근거로 2035년에 의사가 1만5000명 부족하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세 논문은 모두 2020년 전후에 작성됐고 활용한 자료는 2018년경 발표된 공식 인구 추계 데이터들이다. 현재 국내 의사 수 증가율이 OECD 최고이고 지난해는 합계출산율이 0.72명으로 4년째 인구가 자연 감소했다. 건강수명도 증가했다. 의대 증원은 이런 상황까지 감안해 검토할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은 2일 전공의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성사된다면 대국민 담화에서 언급했던 OECD 대비 의사 수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대신 한국의 특수한 의료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개선하는 게 최상의 방법인지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