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품질의 상향 평준화로 디자인은 브랜드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내·외관 디자인이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하면, 제품 성능이 좋더라도 소비자의 외면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각 제조사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가치를 다양한 라인업에 일관적이고 창의적으로 전달할 디자이너 영입에 필사적입니다.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은 이같은 고민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지 월간 연재 코너인 [자동차 디자人]을 통해 살펴봅니다.
오프로더 SUV, ‘그레나디어(Grenadier)’는 영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석유화학기업 이네오스의 자회사, ‘이네오스 오토모티브’가 출시한 첫 번째 차량이다.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단종된 랜드로버 1세대 디펜더와 기계식 사륜구동 자동차 마니아인 짐 래트클리프(Sir Jim Ratcliffe) 이네오스 회장의 아이디어로 출발한 기업이다. 짐 래트클리프 회장은 정통 오프로더가 없어지는 추세를 안타까워하며, SUV다운 성능과 내구성을 지닌 차량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를 설립했다.
2017년부터 자동차 개발을 시작한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2021년, 메르세데스-벤츠로부터 프랑스함바흐 공장을 인수, 본격적인 차량 생산을 준비해 왔다.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는 박스형 사다리꼴 프레임 섀시를 기반으로 BMW 3.0리터 직렬 6기통 터보차저 엔진과 변속기 업체인 ZF의 8단 자동 변속기를 맞물려 만들어진 차량이다. 특히 정통 오프로더의 부활을 표방한 만큼, 3.5톤의 견인 능력과 2000리터 이상의 적재 공간을 비롯해 강인한 외관, 물리 버튼을 곳곳에 배치한 실내 등 인상적인 디자인이 적용됐다.
오프로더 SUV 그레나디어의 디자인을 책임진 인물은 토비 이큐어(Toby Ecuyer)다. 건축 분야와 요트 디자인에서 전문성을 쌓아온 그는 짐 래트클리프 회장의 제안을 수락, 그레나디어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요트 디자이너로 20년간 재직…이네오스 회장과 쌓은 ‘디자인 공감대’ 전직의 계기
유년시절 토비 이큐어는 생각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 재주가 있는 학생이었다. 무엇이든 그림으로 그려 놓고 그것을 토대로 무언가를 추가로 그리고 변경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자동차와 보트, 헬리콥터, 탱크, 건물, 가구 등의 사물도 즐겨 그렸다고 언급했다.
토비 이큐어는 열한 살이던 당시 오스틴 로버(Austin Rover)라는 자동차 제조사에 직접 그린 그림을 보냈는데, 언젠가 디자인 부서에서 일해달라는 제조사의 답장을 받았던 당시를 새로운 세상이 열린 순간으로 회상했다. 수학과 영어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진로를 정한 그는 영국 사우스 데본 예술학교(South Devon college of Arts)에서 삼차원 디자인(Three-Dimensional Design)을 공부하면서 용도와 실용성, 기능성을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건축학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 토비 이큐어를 지도했던 담당 교사는 건축 관련 자격증이 없었던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건축학을 전공하도록 장려했다. 그 결과 토비 이큐어는 플리머스 건축학교(Plymouth School of Architecture)에 진학, 학업을 이어 나갔다.
건축학 전공으로 관련 분야 경력에 집중하던 토비 이큐어는 서류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축 디자인 특성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건축이 흥미로운 분야라는 점은 명확하지만, 디자인 중심의 창작 활동을 원하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고민 해소를 위해 항해를 취미로 삼았던 토비 이큐어는 폴리머스 건축학교 재학 중에도 바다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즐겨 보던 항해 잡지에 게재된 작은 광고가 그의 진로를 바꾼다. 요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토비 이큐어는 직접 그린 수채화를 포트폴리오로 제출해 합격한 후 20여년간 요트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전 세계를 누비며 뛰어나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만나 슈퍼 요트를 디자인했던 토비 이큐어. 그는 짐 래트클리프 이네오스 회장과도 요트를 계기로 만나 인연을 쌓았다.
토비 이큐어는 짐 래트클리프 회장과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디자인 철학도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회상했다. 이 공감대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매우 작은 공간에 반영하는 자동차의 특성, 특히 자동차 디자인이 여러 나라,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한다. 이에 토비 이큐어는 요트 디자인을 내려놓고 그레나디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다.
실용성과 기능을 우선시하는 이네오스 철학…첫 번째 차량 ‘그레나디어’에 반영
정통 오프로더의 부활을 표방한 짐 래트클리프 이네오스 회장은 그레나디어의 디자인 철학으로 실용성을 강조했다. 최고 수준의 오프로드 주행 성능과 오프로더 다운 동급 최고의 견인 및 적재 능력 등을 요구했다. 기능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이네오스의 철학은 건축학을 전공한 토비 이큐어의 이력, 디자인 철학과도 일맥상통했다. 따라서 그는 오프로드 성능뿐만 아니라 편의성 및 미적 측면 등을 고려해 차량 디자인에 나섰다.
토비 이큐어는 모양을 가리는 임의의 디테일이나 차체 패널 없이 4X4 차량임을 강조하는 목적이 명확한 디자인을 그레나디어에 적용했다. 그레나디어는 이네오스 오토모티브의 첫 번째 차량이므로, 기존 플랫폼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 비율의 균형을 유지하기 수월했다고 회상했다.
토비 이큐어는 디자인 책임자로 팀을 이끌며 모든 요소에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레나디어에 불필요한 요소를 담지 않기 위한 질문을 던진 것으로, 특히 차량 실내를 디자인할 때, 기능적으로 직관적인 레이아웃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중앙에 위치한 터치스크린, 기능이 분명한 버튼과 두툼한 다이얼로 정돈한 센터패시아 컨트롤 시스템, 오버헤드 컨트롤 패널은 오프로드 주행 시 조수석 탑승자도 조작 가능하도록 디자인을 적용한 요소다.
보트나 농기계와 마찬가지로 스위치의 간격이 넓고 기능 라벨이 명확하며 운전 중이나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쉽게 조작하도록 실내를 디자인했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인테리어는 소비자의 요구사항에 따라 쉽게 맞춤화가 가능하며, 기존 액세서리와 함께 사용 가능하도록 꾸렸다. 이네오스의 철학인 실용성을 차량에 담은 것이다.
전동화 시대 준비하는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디자인 이끄는 토비 이큐어
전동화 시대로 나아가는 자동차 업계의 추세에 맞춰 올해 초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이네오스 퓨질리어(INEOS Fusilier)를 공개했다. 이 차량은 이네오스 그레나디어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자동차 위탁 생산 업체인 마그나(Magna)와 함께 개발한 차량이다.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는 전동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지난 2023년 7월 영국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Goodwood Festival of Speed)에서 그레나디어 수소 연료전지 데몬스트레이터(Grenadier Hydrogen Fuel Cell Technology Demonstrator)도 선보인 바 있다.
이처럼 전동화 전환에 박차를 가하는 과정에서도 토비 이큐어는 획기적인 변화보다는 자신이 쌓아온 철학인 실용성을 담은 디자인을 차량 내·외관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소비자를 위한 맞춤화 옵션을 차량에 추가할 수 있는 요소를 디자인에 반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동료를 비롯해 어떤 디자이너를 만나든 '왜'와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한 가지 디자인 측면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이전보다 개선된 작업인지, 올바르게 보이는지, 이해하기 쉬운지와 같은 질문에 답을 찾는 방식이다. 그리고 매일 무언가를 그리는 습관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컴퓨터는 유용하고 놀라운 도구지만, 디자이너가 직접 그리는 것이 진정한 마법이라고 믿는 토비 이큐어는 전동화 추세 속에서도 이네오스 오토모티브만의 철학을 담은 차량을 지속해서 선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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