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살 돋게 하려면… 트라우마와 ‘헤어질 결심’부터[기고/정찬승]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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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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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 이사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 이사
긴 생머리가 무거워 보이는 한 여성이 정신분석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사랑하는 남편과 소중한 어린 딸과 함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지만 감정 기복과 불안, 불면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면 차갑게 굳은 무표정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직장 동료들의 인사에는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응대만 할 뿐, 대화는 전혀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자꾸만 움츠러들었고 몸을 숨기기 바빴다. 동료들은 그녀가 어렵게 느껴져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철저히 외톨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사회생활에서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사람의 시선을 피해 자꾸만 움츠러드는 ‘사회공포증’을 겪고 있었다. 문제는 대학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됐다. 한 남학생의 구애를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그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저속하고 행실이 나쁜 형편 없는 여자라고 소문나 있었다. 뒤늦게 그가 찾아와 사과했지만 그녀가 뒤집어쓴 오물 같은 불명예는 지워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 같아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그것을 보상하듯 필사적으로 공부에, 일에 매달렸다.

그녀는 우울과 불면, 사회공포의 문제를 평생 안고 가리라 생각했지만 아이를 낳아 기르며 마음이 달라졌다. 마음의 어둠 속에서 좋은 엄마가 될 수는 없었다. 밤마다 과거의 상처들이 되살아나서 그녀를 괴롭히며 자책과 자학으로 몰아갔다. 그녀는 그 상처들을 저주하며 지워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느 날 그녀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병원에 몸과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그들은 화상 부위를 가리려고 긴 옷을 입고 있었죠. 한 명씩 옷을 벗자 얼룩덜룩 일그러진 화상의 흉터가 드러났어요. 나는 붓을 들어서 화상 모양에 어울리게 그들의 몸에 그림을 그려줬어요. 모두 기뻐했어요. 그리고 자기 몸을 드러내 화상에 그려진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많은 사람이 그 전시회를 보러 왔고 훌륭한 화가들이 내 작업을 칭찬해 줬어요.”

악성 뜬소문은 그녀의 살갗에 불로 지진 듯 흉터를 남겼고 그녀는 늘 자신을 감추고 살아야 했다. 이제 그녀는 그 상처를 돌보고 치유하는 병원을 발견했다. 그녀의 대단한 점은 그다음 작업에 있다. 그녀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흉터를 드러내 창조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힘든 처지에 있는 동료가 조심스레 다가오면 상담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는 무척 기뻐했다. 답답한 긴 머리를 산뜻하게 정리하고 멋지게 물들인 후 찾아와 수줍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 서가에는 자그마한 초상화가 놓여 있다. 무엇이든 뚝딱뚝딱 잘 고치는 만화 속 아저씨라는데 나를 무척 닮았다면서 그녀가 그려준 정신분석 종결 선물이다. 밝고 영리하고 선의가 가득한 그 남자의 얼굴은 바로 그녀의 무의식에 있는 내면의 치료자다. 그런 훌륭한 치료자를 마음속에 가진 여성이라면 어떠한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함부로 던진 말, 무심코 전한 말에 당사자는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받는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폭언과 성희롱은 더욱 심각하다. 상처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흉터가 된다. 그녀는 이런 마음의 흉터를 어떻게 치유하는지 보여 줬다. 골방의 문을 열고 용기를 내어 ‘아프다,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상처는 감춰야 하는 낙인이 될 수도 있고 창조의 화폭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마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녀의 마음을 회복시켜 줬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줬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서 피어난 의술이요, 예술이다.

#헬스동아#건강#의학#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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