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원화 거래량이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제치고 1등으로 올라섰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 규모를 100으로 봤을 때 세계 1위인 미국은 15배가 넘는 1522, 중국은 10배 가량인 1068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6.5%에 불과하다. 세계 외환상품시장에서 원화의 거래 비중은 고작 1.9% 수준이다. 디지털자산 시장에서 원화 거래량이 1등을 차지하는 기이한 현상이 앞으로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국가 경제 규모를 비교해 보면 비이성적 결과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많은 분석가들은 한국 투자자의 투기적 특성에서 이유를 찾는다. 하지만, 이는 원인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진짜 이유 중 하나는 개인과 법인의 참여 기회 제한이다. 우리나라 디지털자산 투자 시장은 투기 성향이 짙은 개인에게는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개방됐다. 반면, 전문 금융 지식과 투자 노하우를 가진 법인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당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그림자 규제가 '법인계좌 개설 금지', '실명계좌 제도', ‘해외 투자자 금지’ 조치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이들 3가지 규제를 분석, 해결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디지털자산에 투자하는 방법
디지털자산에 투자, 보유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흔히 'ICO'라고 일컫는 디지털자산 발행시장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업계획서라고 할 수 있는 백서, 개발조직 등을 분석해 자금을 기부하고 디지털자산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일종의 프라이머리 마켓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지만, ICO 프로젝트가 세계에 퍼져있어 찾기 어려울뿐더러, 워낙 초기 시장이다보니 불확실성이 크다는 측면에서 일반투자자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다음 방법이 세컨더리 마켓, 즉 '유통시장에서 자산을 구매하는 방법'이다. 유통시장에서 자산을 구하려면 거래소 등에서 현금을 주고 사는 방식, 혹은 계약을 통한 자산구매 방식이 있다. 후자는 수요공급이 동일한 대상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종류, 수량, 금액 등 모두 조건이 일치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디지털자산간 교환도 방법이 될 수 있으나 최초 구매시에는 법정화폐가 이용된다는 점에서 대부분 거래소를 통한 법정화폐, 즉 현금구매 방식을 택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부당국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법정화폐의 유통, 관리는 모두 정부 규제에 의하기 때문이다.
법인의 디지털자산 보유, 투자가 금지된 이유
우리나라 금융당국은 2017년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서비스, 일명 ‘실명계좌’ 제도를 통해서 가상자산 사업자(VASP)의 원화취급을 엄격히 제한한다. 거래소와 같은 가상자산 사업자가 '실명계좌 제휴 계약을 체결한 특정 은행의 계좌 보유자'에 한해 '동일 은행 계좌를 통해서만 입출금을 허용'하는 제도다. 거래소와 거래소 고객이 이용하는 은행을 한 곳으로 일치시켜 고객확인, 의심거래확인 등 자금세탁방지를 철저히 하겠다는 취지다.
이는 은행이 거래소 내 고객정보, 입출금 내역, 거래 조회 등의 모든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은행을 통한 간접규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현재 국내 은행과 설명계좌 제공 확인서 발급을 협업, 이 자격을 획득한 사업자는 5개에 불과하다. 전세계 디지털자산 거래 통화 1위 보유국의 위상에 비하면 굉장히 초라한 수준이다.
국무조정실은 2017년 12월 긴급 행정지도를 통해 금융회사의 가상통화 보유, 매입, 담보취득, 지분투자 등을 금지한 바 있다. 당시에 정부는 가상통화라고 칭하며 부정적 인식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금융기관, 특히 은행들은 계좌발급사에 대한 디지털자산 보유를 엄격히 모니터링하고, 필요시 계좌 해지까지 단행하도록 행정지도를 내렸다. 당시 관련 사업자 정보가 부족했던 은행들은 전국은행연합회를 통해 디지털자산 기업 리스트를 수집, 공유하고 각 은행 지점들은 디지털자산 보유, 투자 기업들의 실사에 나서는 등 적극 대응했다. 하나의 법인계좌로 고객 투자금을 받아서 운영하는, 일명 벌집계좌가 적발돼 계좌해지를 당한 몇몇 거래소는 가처분금지 행정소송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결국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정부는 실명계좌 제휴관계에 있는 은행과 거래소를 통해 법인의 실명계좌와 전자지갑 개설을 막아왔다. 이에 따라 가상통화 투기근절 대책발표 이후 현재까지 6년이 넘는 기간동안 국내 법인들은 디지털자산을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명문화된 법이 아닌, 은행과 거래소 행정지도를 통한 간접규제다. 디지털자산 업계의 대표적인 그림자 규제라고 할 수 있다. 법인, 기관의 디지털자산 시장 진입 불가로 인해 국내 거래소내 투자자는 100% 개인 차지가 되었다. 철저히 개인 중심으로 변한 디지털자산 시장에는 투기현상 과열, 국내외 자산의 가격 격차가 심해지는 일명 ‘김치 프리미엄’ 등 여러 후유증이 발생한다.
디지털자산 시장에 법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
디지털자산 시장의 부작용을 줄이려면 법인, 기관의 시장진입을 단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철저히 시장수요 관점에서 다루되, 불법 행위에는 철퇴를 가해 시장 건전성을 유지해야 한다. 위법적이고 투기성 짙은 법인의 수요는 엄중히 차단해야겠지만 신사업 진출, 투자 포트폴리오 분산을 위한 자산 보유는 허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장 투명성, 건전성을 점차 높일 수 있다. 반면 개인투자는 현행보다 엄격한 잣대로 다뤄야 한다. 금융 지식이 부족한 개인은 금융기관 등을 통한 간접 투자를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금융기관의 디지털자산 투자 허용이 선행되어야 한다.
디지털자산과 같은 고위험 자산 투자 환경에서 금융기관은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투자지식이 부족한 개인투자자를 위해 투자유형을 구분하고 다양한 금융기법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만일 직접 투자를 선호하는 개인이라면 전문투자자, 일반투자자로 구분하여 일반투자자는 고위험 직접 투자에 따른 사전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묻지마 투자 근절에 나서야 한다. 이는 투자금융 시장에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규제가 아니다. 금융당국은 디지털자산을 투자자산의 한 유형으로 인정하고 기존 금융자산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관리하는 포용적 자세를 나타내야 한다.
법인의 디지털자산 보유를 허용하면 투자시장이 과열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난 2017년에나 생각할 수 있는 우려에 불과하다, 법인, 기관은 고위험 상품일수록 더욱 신중하게 투자를 검토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덕에 개인은 디지털자산 현물에 굳이 직접 투자하지 않더라도 금융기관을 통해 간접 투자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미국, 홍콩, 캐나다, 호주 등 금융선진국들은 비트코인을 기초자산으로 한 제도권 금융상품을 앞다퉈 출시한다.
올초 미국에서 비트코인 ETF가 출시된 이후 JP모건, 모건스탠리, 웰스파고, UBS, BNP파리바 등 세계 600개가 넘는 유수의 금융기관들이 35억 달러(약 4조 7000억 원)가 넘는 투자를 단행했다. 홍콩 또한 비트코인ETF에 이어 이더리움ETF까지 승인하며 디지털금융 패권국 탈환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가 법인의 디지털자산 보유조차 금지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디지털금융 후발주자를 자처하는 처사와 다르지 않다. 아시아 금융허브를 넘어 세계 금융중심지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법인의 디지털자산 투자가 허용되고, 나아가 디지털자산을 기초로 한 금융상품이 속히 출시되기를 기대해본다.
글 /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시중은행 디지털금융 전략기획자 출신으로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인피닛블록’의 공동 창업자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디지털자산 인프라 협의회 협의회장, 한국핀테크산업협회 이사, 한국핀테크지원센터 혁신금융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새로운 시대의 부, 디지털자산이 온다’, ‘블록체인 트렌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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