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에 전이된 암, 양성자 치료로 잡았다[병을 이겨내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20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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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리 삼성서울병원 교수-간 전이 정윤재 씨
직장암-신장암 제거 후 항암치료, 1년 후 간 전이 확인… 수술 어려워
부작용 심해 2차 항암치료 못 끝내… 다른 방법 찾다 접한 새로운 기술
양성자빔 5회 맞아… 암 흔적만 남아, 재발 가능성 매우 낮아 ‘완치의 길’

김나리 삼성서울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왼쪽)는 전이된 간암과 폐암, 두경부암, 소아암에서 수술이 불가능할 경우 양성자 치료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성자 치료로 간암이 거의 사라진 정윤재 씨(오른쪽)와 아들 석일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김나리 삼성서울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왼쪽)는 전이된 간암과 폐암, 두경부암, 소아암에서 수술이 불가능할 경우 양성자 치료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성자 치료로 간암이 거의 사라진 정윤재 씨(오른쪽)와 아들 석일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2020년 12월, 대변에 피가 섞여 나왔다. 정윤재 씨(71)는 겁이 났다. 그래도 심각한 질병은 아닐 거라며 놀란 마음을 달랬다. 정 씨는 치루가 재발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여 년 전에 치루 진단을 받았었다. 치루가 악화해 지금 피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동네 병원에서 치루 수술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다음 날 오전에 터졌다. 수술이 끝났는데도 항문에서 피가 나왔다. 의사는 대장 내시경 검사를 시행했다. 직장 부위에서 혹 같은 것이 보였다. 의사는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정 씨는 인근 A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 치루인 줄 알았는데 암

A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받았다. 우려가 현실이 돼 버렸다. 직장암 2기였다. 림프절 전이도 의심된다고 했다. 전이됐다면 직장암 3기로도 볼 수 있는 상황. 암은 직장 안쪽 3분의 2를 막았다.

추가 검사에서 신장 혹이 발견됐다. 예전부터 물혹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혹이 어느새 커져 있었다. 조직검사를 했는데, 이 혹 또한 암으로 판명 났다. 직장암이 전이된 것이 아니라 신장 자체에서 새로 암이 발생한 것이다. 두 가지 암을 동시에 진단받은 것.

두 암을 동시에 제거해야 했다. 2021년 2월, 정 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시간만 10시간 가까이 걸렸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직장과 신장의 암은 모두 제거됐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세한 암세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될 수도 있다. 의료진은 예방적 항암치료를 시행하기로 했다.

2021년 3월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2주마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항암치료는 총 12회 일정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순탄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첫 3회까지는 밥맛이 좀 떨어지는 정도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견딜 만했다. 동네를 세 바퀴 걷고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기력도 좋았다. 하지만 4회째 항암치료를 받을 때부터 기력이 크게 떨어졌다.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버티는 심정으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8회 치료를 끝낸 후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의료진과 상의한 끝에 치료를 2주 정도 중단했다. 이후 다시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여전히 몸에 힘이 없고 입맛이 없었다. 제대로 식사하지도 못했다. 이를 악물고 12회 항암치료를 모두 끝냈다.

● 간으로 전이, 수술 불가 판정

수술에 항암치료까지 모두 끝냈으니 더 이상 암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되기를 기대했다. 암의 전이와 재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추적 관찰 검사를 할 때마다 두근거렸다.

약 1년이 지났다. 2023년 3월, 간에서 암 2개가 발견됐다. 직장암이 간으로 전이된 것. 전이된 간암 치료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암이 혈관 가까운 쪽에 있어 방사선 치료를 시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간 기능도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섣불리 수술을 시도했다가는 간부전이 올 수도 있었다. 의료진은 일단 항암치료로 암 크기를 줄인 뒤 수술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시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12회 일정이었다. 부작용은 1차 때보다 더 심했다. 거의 걸을 수조차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에 부쳤다.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도저히 암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 씨는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항암치료는 끝내지 못했지만 수술이 좀 가능해졌을까 싶어 2023년 9월 수술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수술을 앞두고 시행한 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이 나왔다.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앞길이 막막했다.

다른 치료법이 없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정 씨의 아들 석일 씨(44)는 “정 안 되면 해외로 가서라도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양성자 치료가 전이된 간암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성자 치료는 삼성서울병원과 국립암센터, 두 곳에서 시행 중이라 했다.

● 양성자 치료로 암에서 벗어나

삼성서울병원 양성자 치료실 모습. 양성자 빔이 정확히 암세포만 골라서 파괴해 주변 장기나 조직을 손상하지 않는다. 양성자 치료는 국내에서 삼성서울병원과 국립암센터 2곳에서만 시행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삼성서울병원 양성자 치료실 모습. 양성자 빔이 정확히 암세포만 골라서 파괴해 주변 장기나 조직을 손상하지 않는다. 양성자 치료는 국내에서 삼성서울병원과 국립암센터 2곳에서만 시행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제공
지난해 10월, 정 씨는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으로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 그때 김나리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수술이 어렵거나 항암치료가 어려울 때 선택할 수 있는 치료법이다. 정 씨가 딱 그랬다. 암을 눈에 띄게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양성자 치료가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양성자 치료에 앞서 양성자 빔이 제대로 주입되도록 호흡 훈련을 했다. 이 훈련을 비롯해 준비 작업에 약 1주일이 걸렸다. 치료 예정일이 됐다. 양성자 빔을 월∼금요일 매일 30분씩 맞았다. 이것으로 양성자 치료는 끝났다. 김 교수는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연속적으로 양성자 빔을 쏜 후부터는 경과를 관찰한다”고 설명했다.

정 씨도 그 후 정기적으로 관찰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간에 있던 두 개의 암 중 하나는 흔적만 남았다. 나머지 하나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기대 이상의 치료 효과였다. 하지만 암이 다시 커질 수도 있지 않을까. 김 교수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완치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 물론 아직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직장과 신장 상태는 지방 A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정 씨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한 삶을 보내고 있다. 몸이 급속도로 좋아졌다.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의사가 먹지 말라고 금지한 음식 외에는 모든 음식을 제대로, 잘 먹는다. 걷기 운동도 재개했다. 산을 좋아해서 산에 자주 간다. 매일 두 시간씩은 걷는다. 정 씨는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라며 웃었다.

투병하는 동안 가족이 힘들었다.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때마다 석일 씨가 많이 노력했다. 석일 씨는 수시로 집에 들러 아버지를 살폈다. 병원에 갈 때도 늘 동행했다. 양성자 암 치료법도 석일 씨가 물색했다. 석일 씨는 “아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니다. 아들이 나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암세포 다시 자랄 확률 크지 않아”


양성자 암 치료법은 주로 간암이나 폐암, 전이된 간암이나 폐암, 두경부암, 소아암일 때 많이 활용한다. 방사선 치료의 한 종류다. 양성자 빔을 쏘면 암세포를 골라서 파괴한다. 방사선 치료보다 더 정밀하고 적은 횟수로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방사선은 닿는 부위가 넓다. 이 때문에 병든 조직뿐 아니라 주변 건강한 장기까지 파괴한다. 반면 양성자는 목표 지점에 정확히 닿기 때문에 주변 장기나 조직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김 교수는 “일반 방사선 치료는 부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30회는 해야 한다. 반면 양성자 치료는 길어도 10∼15회로 끝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양성자 치료는 매일 이어서 하는 게 원칙이다. 이유가 있다. 종양 세포는 치료해도 다시 자라기 때문에 가급적 자주 억제해 주면 좋다. 하지만 하루에 2회 이상 양성자 빔을 쏠 경우 정상 장기들이 제 기능을 회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때문에 매일 1회 시행하되 며칠 동안 이어서 하는 것이다.

양성자 치료 이후 사라지거나 줄어든 암세포가 다시 자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김 교수는 “크지 않다”고 했다. 보통 양성자 치료를 끝내고 5년 정도 지날 때까지 암이 자라지 않을 확률이 80∼90%에 이른다는 것. 다만 다른 부위로 암이 전이될 수는 있기에 정기적으로 관찰할 필요는 있다. 보통은 치료 후 1년 이내는 3개월마다, 그 후로는 6개월마다 정기 검사를 통해 확인한다.

최근 국내 대학병원에도 ‘꿈의 암 치료기’라고 불리는 중입자 치료기가 도입됐다. 중입자 치료기는 치료율이 높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진료비가 수천만 원이라는 단점이 있다. 반면 양성자 치료는 전립샘암과 유방암을 빼고 대부분 암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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