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자산 산업의 발전 양상은 다른 산업군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다르다. 그 중에서도 블록체인 기술 기반이라서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시장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먼저 일어나고 난 다음에 정부 정책이 뒤따른 형국이다. 인공지능과 블록체인,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통 산업에서는 디지털 전환이 큰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디지털자산은 태생이 디지털인 디지털 네이티브 자산이다. 그동안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디지털화된 산업이기 때문에 기존 산업과 태생부터 다르고 성장의 궤도 달리 한다. 특히 산업의 파급력, 확장성 등 속도면에서 차이가 크다. 이는 정부 주도하에 시행, 추진되던 유수의 산업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탈중앙 금융이라고 일컬어지는 디파이(DeFi)는 전통금융을 완전히 대체하기 위해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점차 닮아가고 있다. 디파이든 전통금융든 우리가 흔히 금융업이라고 인식하는 서비스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류는 그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서 최적화된 금융시스템을 만들어 간다. 디파이는 전통금융에서 불필요하게 추가된 중개인들을 과감하게 제거하면서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사람의 개입이 아닌 코드를 통해 신뢰성을 입증한다. 전통금융도 디파이의 도전과 경쟁을 통해 점진적 변화를 시도한다. 이처럼 태생부터 다르게 시작했던 양극단의 금융시스템은 서로 닮아가면서 성장한다. 디지털자산 산업에서 정부의 역할
디지털자산 거래소를 비롯하여 전세계 디파이 관련 해킹 사건·사고는 그동안 너무 많이 발생해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연이은 대형 거래소 해킹 사고로 곤란을 겪었다. 2014년 마운트곡스의 480억 엔(약 4250억 원) 규모 해킹, 파산을 시작으로 2018년에 코인체크가 580억 엔(약 5134억 원), 2024년에 DMM비트코인이 482억 엔(약 4267억 원)을 해킹당했다. 세 개 거래소에서만 무려 1542억 엔(약 1조 3600억 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투자자들이 마냥 거래소의 선관주의에만 기대기엔 너무 큰 금액이다. 디파이도 전체 시스템의 효율화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감시기관을 두고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할 이유다.
아무리 선량한 의도를 가진 금융서비스라 할지라도, 자발적 의도의 한계성이 있으니 믿을 만한 제 3자의 개입은 필요하다. 단순 해킹 사고는 물론이고 시세조작, 불공정거래, 금융사기 등을 방지해 다수의 건전한 투자자를 다시 끌어들이는 선순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렇다면, 디지털자산 산업도 현행 금융시스템과 같이 한국거래소, 예탁결제원, 예금보험공사, 금융결제원 등 중개와 감시 기구들을 정부 주도하에 설립하고 운영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디지털자산 산업을 기존 산업과 동일하게 취급해 정부 주도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막대한 세금과 인력이 동원되야 하므로 논의와 합의, 실행 등 합의 과정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속도도 아주 느릴 것이다. 이처럼 느린 프로세스로는 산업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디지털자산 산업은 고객 수요로부터 시작된 덕분에 다양한 특성을 가진 민간 기업들이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될성부른 스타트업을 육성하여 산업을 키우고 공정한 시장을 조성할 수 있게 지원하는 일이야말로 정부가 할 일이다. 산업계에 포진한 매매와 수탁, 운용과 결제, 관리 등 다양한 기업들을 통해 시장을 규율하고 안정적인 생태계를 만들도록 지원해야한다.
미국을 비롯해 홍콩과 영국, 호주 등 금융 선도국가에는 특징이 있다. 매매와 수탁, 운용과 결제 등 다양한 분야의 금융 기업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포진한 점이다. 이를 기반으로 해당 국가들은 비트코인 현물 ETF를 출시할 수 있었다. 이른바 디지털자산 인프라가 튼튼하고 생태계 구축이 잘되어 있어서다. 기업들의 특성을 고려한 사업모델과 차별화를 통해 산업 경쟁력을 높인 효과를 냈다. 이들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상호 경쟁을 통해 견제하고 감시하며 보완한다. 산업의 선순환 체계를 갖춘다. 일반 산업에서도 이는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산업 발전이 더딘 나라일수록 이러한 체계가 미비하다. 디지털자산 산업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자산 산업이 장기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갖춘 건전한 생태계 조성이 필수적이다.
선수가 아닌 심판 역할
라이선스란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행정기관이 공적으로 허용하는 허가증 혹은 면허증을 말한다. 라이선스를 획득하려면 갖출 요건들이 많다. 정부가 규정하는 최소한의 가이드를 마련하고 이를 준수해야만 라이선스 획득과 유지가 가능하다. 어려운 유지, 운영조건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라이선스 취득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보유기업만이 공식 특혜를 얻어서다.
국가는 기업이 돈을 벌게 해주고, 그 기업을 통해 규율을 확립한다. 인허가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제도를 운영한다. 국내에서 가상자산사업을 운영하려면 금융정보분석원에 사전 등록해야 한다. 현행 국내 디지털자산업은 법률에 따라 매수·매도, 교환, 보관·관리, 이전, 중개·알선·대행 등 크게 5가지 분야로 구분한다. 이를 조합해 얼마든지 새로운 사업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금융위가 ’21년 2월에 발표한 ‘가상자산사업자 신고 매뉴얼’은 거래소, 보관·관리(수탁), 전자지갑 등 3가지 사업유형만을 예시로 들었고, 이들만이 암묵적으로 인정된다.
기존의 획일화된 예시에서 탈피해 운용과 거래, 장외거래와 시장조성, 자문일임 등 금융업에 준하는 업무분야로 점차 세분화해 다양한 사업모델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 최초 디지털자산 특별법인 유럽의 암호자산법(MiCA)에서도 주문집행, 인수·주선, 이전, 주문접수·전송, 자문, 일임, 보관·관리, 교환, 플랫폼 운영 등으로 세분화하고 이를 인가 단위별로 구분한다.
지난주 우리나라에서도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이 시행됐다. 금융위원회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는 645만명, 투자금은 44조 원에 달할 정도로 커졌다. 이번 이용자보호법으로 불건전한 투기수요를 잠재웠다면, 이제는 산업 진흥 측면도 함께 고려할 때다. 정부 주도로 산업 인프라를 구축했던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민간 기업을 최대한 활용, 그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경쟁력있는 기업에게는 라이선스와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산업 저해가 되는 기업은 과감히 퇴출해 건강한 산업생태계 조성에 힘써야 한다.
미국의 차기 대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대통령은 ‘크립토 대통령’을 천명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 홍콩, 두바이 등 글로벌 금융허브를 꿈꾸는 국가들도 디지털자산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산업육성 정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지금 당장 그들 국가와 선두 경쟁이 어렵다면 최소한 속도 경쟁이라도 해야한다. 우리나라도 민관이 머리를 맞대서 디지털자산 산업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묘안을 논의할 때다.
글 / 정구태 인피닛블록 대표
시중은행 디지털금융 전략기획자 출신으로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인피닛블록’의 공동 창업자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디지털자산 인프라 협의회 협의회장, 한국핀테크산업협회 이사, 한국핀테크지원센터 혁신금융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새로운 시대의 부, 디지털자산이 온다’, ‘블록체인 트렌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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