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크리에이티브가 8월 19일 서울 코엑스에서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인 ‘픽셀(PIXEL)’을 개최했다. 2018년 에픽세븐을 출시하며 국내 서브컬쳐 게임 시장의 선구자 역할을 한 슈퍼크리에이티브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 개발자 컨퍼런스다.
행사 개회사에서 김형석 슈퍼크리에이티브 대표는 픽셀을 ‘2차원 게임 개발 컨퍼런스’로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2차원 게임을 2D 그래픽 게임이 아닌 일본 2D 애니메이션, 이른바 ‘아니메(Anime)’ 스타일의 게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김형석 대표는 중국 호요버스의 ‘원신’을 최초의 2차원 트리플A 게임(대자본을 투입한 게임)으로 규정하며, 그 등장을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언급했다. 그는 “원신의 라이브 서비스 개발비는 2600억 원, 연평균 매출은 2조 원에 달한다. 그동안 이 정도 자본을 들여서 만든 2차원 게임은 없었다”고 말했다.
원신의 등장은 글로벌 서브컬쳐 게임 시장의 급성장이라는 기회가 된 동시에 국내 게임 개발사에는 위협도 되고 있다. 김형석 대표는 “2018년에 에픽세븐을 런칭한 이후 시장이 두 배 이상 커졌다. 2차원 게임 시장에서 원신이라는 특이점의 출현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이어 “호요버스는 원신 이후로 매 2년마다 트리플A 게임을 계속 출시하고 있고, 이외에도 많은 중국 게임 회사가 트리플A 게임을 만들고 있다. 트리플A 게임 개발 경험이 없는 국내 개발사에겐 좌절, 패배감, 무력감이 들 수도 있다. 4~5년 동안 더블A 게임을 개발해서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픽셀’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업계가 함께 인사이트와 경험을 나누며 성장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기 위한 취지에서 연 행사다. 김형석 대표는 “결과는 시장 상황과 운에 따르기도 하지만 결국 제품에 달려있다”면서 “대부분 성과를 낸 작품들은 시장을 전혀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장이 없거나 죽어있을 때 성공하고 더 빛이 난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기꺼이 가고 싶은 길에 대해 얘기하고, 시장과 트렌드를 넘어서는 멋진 작품에 다다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슈퍼크리에이티브 임직원을 포함한 내외부 인사 약 370명이 참여했다. 15명의 슈퍼크리에이티브 발표자와 4명의 외부 발표자가 총 19개 세션을 맡으며 인사이트를 나눴다. 강연 후에는 실시간 질의응답으로 청중과 소통하며 깊은 논의를 이어갔다. 강연 외에도 다양한 게임 이벤트 부스와 케이터링 서비스, 경품으로 강연 사이 참가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김준범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개발 스튜디오 프로그램실 파트장은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개발 과정에서 거쳐 간 전투 시스템의 변천사를 소개했다.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는 신규 IP로 제작 중인 슈퍼크리에이티브의 신작 게임이다. ‘슬레이 더 스파이어’에 영감을 받은 로그라이크 덱 빌딩 게임에 캐릭터 수집형 게임 요소를 결합했다.
김준범 파트장은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의 전투 시스템이 2020년 알파 빌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그라이크 덱 빌딩 게임에 캐릭터 수집 게임이라는 상반된 장르의 재미를 함께 담아내기 위한 고민의 결과다.
가령 캐릭터가 너무 뛰어나면 덱 빌딩의 재미가 떨어지고, 덱 빌딩의 재미만 추구하면 캐릭터 개성이 묻히게 되는데 이런 두 장르적 요소 사이의 절묘한 밸런스를 찾기 위해 수많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이다. 김준범 파트장은 ”로그라이크 덱 빌딩 게임을 모바일 게임으로 제작하면서 가능한 모든 전투 시스템을 최대한 시도해봤다”고 표현했다.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가 이처럼 많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할 수 있었던 건 개발 편의 기능을 잘 갖춘 덕분이다. 김준범 파트장은 “버그 재현을 위해 전투 상황을 그대로 저장하고 불러오는 기능을 구현했다. 현재 상태만 저장해서는 큰 의미가 없기에 시작 상태를 저장하고 이용자 명령을 저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용자 명령을 하나하나 적용하며 현재 상태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이용자 명령 중 마지막 하나를 제외하고 실행하면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버그 발생 시 자동 저장 기능, 로그인 및 데이터베이스 리비전 기록 등을 추가하며 QA와 기획팀 사이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확연히 줄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에픽세븐 캐릭터 원화팀에서는 ‘캐릭터 애호가를 위한 캐릭터 디자인 연구’라는 주제로 강연을 준비했다. 원화팀은 “최근의 캐릭터 트렌드 변화는 단순한 유행의 변화로 단정 짓기는 부족하다. 플러스알파(+α)가 있다. 그게 바로 지식재산(IP)”이라며 “이전에는 게임에서만 캐릭터가 소비됐다면 지금은 의류, 소품 등 여러 영역으로 확장 중이다. 브랜딩과 프랜차이즈의 핵심 요소가 캐릭터가 됐다”고 말했다.
디지털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이슈화를 위해 많은 서브컬쳐 게임이 플래그십 스토어, 팝업 스토어 등으로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이들을 소비자로 전환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런 브랜드 경험의 중심에 캐릭터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캐릭터에도 트렌드와 차별성, 유연성이 공존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원화팀은 강조했다.
이를 캐릭터 디자인에 반영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사전 지식 활용, 언밸런스한 디자인, 패턴 부수기, 다른 매체 학습, 상징물, 상징 컬러 등을 제시했다. 가령 에픽세븐의 캐릭터인 '시종관 베라'는 유명 패션쇼에서 모델이 펼친 무대를 모티브로 삼아 디자인되었다. 상인이라는 정체성과 의뭉스러움이라는 캐릭터 성격을 부채 형태의 주판이라는 아이템으로 구현한 '다나'의 디자인은 사전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박성진 에픽세븐 프로그램실 실장은 에픽세븐 중국 서비스 출시 경험담을 공유했다. 에픽세븐은 지난해 6월 중국 정식 서비스 시작하기까지 길고 긴 판호 준비 과정을 거췄다. 판호는 게임을 중국에 서비스하기 위해서 받아야 하는 서비스 허가권이다.
판호를 발급받으려면 심의 규정에 맞춰 리소스와 스토리 콘텐츠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에 관해 박성진 실장은 “판호 발급은 정치외교적 요인으로 인한 변수가 많다”며 “판호를 준비한다면 단기간 총력전이 아닌 장기 지구전에 베팅하는 걸 추천한다”고 조언했다. 판호가 단기간에 나올 것으로 예상해 제대로 된 정식 프로세스를 마련해두지 않으면 장기간 임시변통으로 비효율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판호 발급 이후 서비스 출시 및 운영 과정에서도 원팀 원소스를 통한 운영 효율화와 이를 위한 효율적인 리소스와 소스코드 관리 체계 마련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성진 실장은 “다른 개발사에서는 중국 서비스 팀을 따로 두기도 하지만, 그러면 개발 비용 상승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상우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개발 스튜디오 보이스 디렉팅 매니저는 ‘목소리 그 너머에’라는 주제의 강연으로 보이스 디렉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명품을 봤을 때 역시 명품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뛰어난 만듦새가 있다. 트리플A 게임에서 그런 마감을 갖추게 하는 요소 중 하나가 성우 디렉팅”라고 말했다.
박상우 매니저는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나 캐릭터의 성우, 대중적 인기가 많은 성우, 좋은 목소리와 연기력을 갖춘 성우를 캐스팅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 강조했다. “유명 인기 성우의 경우 대중과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목소리만 구사하게 되면서 연기의 스펙트럼이 좁아지고, 전형적인 연기만 하게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작 게임일수록 도전적인 캐스팅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작 게임 캐릭터에게 같은 성향의 캐릭터라고 같은 성우를 쓰면 중복 아닌 중복 캐스팅이 된다. 자칫 이전 작품의 캐릭터 이미지가 덧씌워지거나 해당 성우의 대표 캐릭터의 아류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면서 “기존 캐릭터의 틀을 깨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성우 디렉터라면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상우 매니저는 AI 성우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 성우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예측도 내놓았다. 실물 재화가 아닌 비트코인을 기념주화로 제작하거나,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는 것처럼 사람들은 존재의 증명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박 매니저는 “이용자들은 캐릭터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그 증명이 성우”라며 “성우는 캐릭터 전달자로서 이용자들이 사랑해 주기 바라는 사람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의 가장 마지막 세션은 다시 김형석 대표가 ‘2024년 한국에서 서브컬쳐 게임을 제작한다는 것의 의미’라는 주제로 장식했다.
김형석 대표는 오타쿠들의 2차원 콘텐츠 소비가 1980년대 거대한 이야기 소비에서 2000년부터 2010년 중반까지 파편화된 캐릭터 소비로 변화했다가 다시금 이야기 소비로 회귀했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세대, 형태의 오타쿠가 새롭게 탄생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김형석 대표는 “현재 가장 큰 2차원 콘텐츠 시장인 중국의 오타쿠가 1970년대 오타쿠와 유사하다”면서 “스토리 중심인 현재의 오타쿠 시장이 언젠가 다시 캐릭터 소비로 회귀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 시장이 앞으로 훨씬 더 거대하고 대중화한 시장이 될 것이란 점”이라고 덧붙였다.
오타쿠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는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미래는 긍정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김형석 대표는 “오타쿠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한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보면 아직 개선의 여지가 많이 남았다는 의미”라며 “2차원 게임이란 거대한 장르는 앞으로도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고, 그 맥락에 따라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함께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개발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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