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으로부터 “얼굴 모양이 변했다”고 들은 뒤에 병원을 갈 만큼 증상이 상당히 서서히 진행되는 ‘말단비대증’은 최장 10년 뒤 처음 진단될 정도로, 조기 발견과 치료가 힘든 실정이다.
얼굴 모양 변화, 손발 크기 증가 등의 증상과 다양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어 환자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 환우회마저 없을 정도로 희귀한 질환이다. 더구나 국내 약제 건강보험 급여 기준이 엄격해서, 쓰고 싶어도 사용이 어려운 환자들이 많다.
증상 5~10년 지나서도 정확히 진단받지 않은 경우 많아
31일 의료계에 따르면 말단비대증은 성장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인한 희귀질환이다. 약 95%의 환자가 뇌 내 뇌하수체 종양으로 성장호르몬이 과분비된다. 전 세계 유병률은 인구 10만 명당 6명이다. 국내 유병률도 이와 유사하게 인구 10만 명당 6.8명(2018년 기준) 보고됐다.
대표적인 증상은 얼굴 모양과 손발의 변화다. 특히 한 번 생긴 변형은 되돌리기 힘들다. 증상 자체가 서서히 진행돼 발생 후 5~10년이 지나서도 정확한 진단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관절통, 두통, 시야 결손 등도 주된 증상이며 당뇨병, 고혈압, 심혈관계 합병증, 수면무호흡증 등도 동반될 수 있다. 따라서 말단비대증 환자 사망률은 일반인보다 약 2~3배 정도 높고, 이는 주로 악성 종양이나 심혈관계 질환 때문으로 알려졌다.
뇌하수체 질환 권위자로 최근 방한한 미국 시더스 사이나이 병원의 로렌스 카츠넬슨 교수는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이뤄진 변화가 파악되는 경우들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얼굴 좀 바뀌었다’고 말하거나 치아나 턱의 골격이 바뀌어 치과를 거쳐 진단받는다”고 했다.
진단은 특징적인 얼굴 모습이나 손발 모양 평가, 혈액 검사, 영상 검사 등으로 이뤄진다. 혈청 성장호르몬을 측정할 수 있는 경구 당부하 검사(확진 검사)나 성장호르몬에 의해 간에서 생성되는 인슐린유사성장인자-I(IGF-I)을 측정함으로써 진단할 수 있다.
김정희 서울대학교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성장호르몬이 간에서 IGF-1으로 만들어진다. 이 물질이 과다 분비돼 말단비대증에 이른다. 최근에는 임상 양상이 뚜렷하면 확진 검사 없이 IGF-I 상승 소견만으로도 말단비대증을 바로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꾸준히 치료하면 증상이나 합병증 나빠지지 않을 수 있어
치료 목표는 성장호르몬과 IGF-1의 과다 분비를 조절하고, 과다 분비에 따른 합병증 및 사망을 예방하는 데 있다. 뇌하수체 종양 크기를 감소시켜 주변 조직을 압박해 생기는 시야 결손 증상도 호전시킬 수 있다.
일차적 치료법은 수술이다. 코의 비강을 통해 뇌하수체 위쪽에 자리한 선종을 제거하는 ‘경접형동 선종 제거술’이 진행된다. 종양이 크거나 주위 조직으로 침범한 경우, 수술로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워 성장호르몬 분비를 억제할 방사선 요법과 약물 치료법이 도움 된다.
약물 치료로는 소마토스타틴 유사체, 도파민 작용제, 성장호르몬 수용체 길항제 등이 사용된다. 소마토스타틴 유사체의 경우 서방형 옥트레오타이드(Octreotide)와 란레오타이드(Lanreotide) 제형으로, 4주 정도 간격으로 근육 혹은 피하 주사로 투여할 수 있다.
김 교수는 “IGF-1 정상화에 소마토스타틴 유도체는 일차 약물 치료제로 추천된다”고 했다. 로렌스 교수는 “당초 하루에 3번 맞아야 했을 약이지만, 4주 간격 주사제 등장으로 환자 편의는 개선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얼굴과 손발 변형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일부 환자는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국내에는 환우회도 없어 정보를 공유하기도 녹록지 않다.
로렌스 교수는 “말단비대증도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만성질환으로 관리해 나간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된다. 꾸준히 치료받으면 나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한국에도 지원 단체가 생겨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 교수는 약제에 대한 국내 건강보험 급여 기준이 엄격하다고 토로했다. 국제 치료 지침은 말단비대증 진단과 소마토스타틴 유사체 치료 유효성 평가 기준에 성장호르몬 측정과 IGF-1을 모두 담은 반면, 국내 기준은 성장호르몬 수치에 국한됐다.
김 교수는 “성장호르몬 수치가 낮아도 IGF-1은 높은 환자들이 약 30% 정도다. 이들의 투약 시작과 증량이 힘든 게 현실”이라며 “전 세계적으로 진단 기준을 IGF-1로 쓰는 추세에 국내 급여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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