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디피에트로의 신작 뮤지컬 ‘폴링 포 이브(Falling for Eve)’. “조 디피에트로가 누군데?”라고 묻는다면 ‘아이 러브 유’와 ‘올슉업’의 원작자라는 정도로만 해두자.
‘폴링 포 이브’는 성경에 나오는 창세기, 그 중에서도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쯤에서 “아하! 종교 뮤지컬이군”이라고 생각한다면 틀림없는 오산이다. 그것은 ‘소림사’ 시리즈를 불교영화라고 판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여하튼 ‘폴링 포 이브’는 무대도 배우도 단출하다. 무대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턴테이블(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형무대 장치), 양쪽 끝에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2층 무대가 있다. 무대 오른편 허공에는 둥근 구조물 하나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세트는 방금 세탁한 식탁보처럼 온통 하얀 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마치 종합병원 병실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사방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태초의 일이니 등장인물이 많을 리 없다.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전부. 여기에 하나님(놀랍게도 남녀 하나님이 따로 등장한다)과 두 명의 천사가 ‘폴링 포 이브’ 출연진의 전부이다. 뮤지컬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멀티맨, 앙상블이 ‘폴링 포 이브’에서는 완전히 지워져 있다.
얼개는 창세기에서 따왔지만, 세부적인 부분을 살짝 살짝 비틀어 재미를 준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는 것까지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아담은 먹지 않아 이브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는 발상은 꽤 파격적이다.
물론 극의 후반에 이르러 아담은 이브와 만나기 위해 선악과를 먹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축출된 연인은 재회 끝에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의 사랑으로부터 인류의 ‘번식’이 시작되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더라 … 하는 내용이다.
국내 제작팀이 거의 새로 창작을 하다시피 했다는 대사의 맛이 뛰어나다. 천사 미카엘(정상훈 분)이 아담에게 “자네는 흙으로 만들었어. 핸드메이드지”라고 한다든가, 에덴동산의 과일을 두고 “이 모든 것이 다 유기농이야”, 하나님이 아담에게 “‘오 마이 갓!’ 이거 하지 마”라는 식의 대사가 쏟아진다.
‘스팸어랏’에서 객석을 웃음으로 초토화시키는 절정의 개그코드를 과시했던 정상훈, 김대종의 호흡은 ‘폴링 포 이브’에서도 그야말로 척척. 옛날같으면 남철, 남성남 콤비를 보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남자 하나님’으로 데뷔 이래 ‘최고위직’ 배역을 맡은 김대종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자칫 깃털처럼 훌훌 날릴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를, 띄울 땐 띄우면서도 지나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 배우가 올해 참 잘 되겠구나”싶었다.
정상훈과 남녀 콤비를 이룬 여자천사 ‘사라’ 역 최혁주의 연기도 별 다섯 개짜리. 30대 후반의 나이에 그토록 깜찍하고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여배우가 우리나라에 또 있을까 싶다.
한없이 귀여워 손바닥 위에 올려놔도 될 것 같지만, 합창 장면에서 터뜨리는 폭발적인 목소리는 “그럼 그렇지”싶다. 최혁주가 누구인데. 나름 뮤지컬계에서는 몇 안 되는 ‘카리스마 여왕’ 중의 한 명이 아니던가.
‘이브’ 역의 이정미는 전형적인 ‘탄산과’ 목소리를 가졌다. 듣고 있으면 청량하기 그지없어 묵은 귓밥이 떨어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록밴드 ‘뷰렛’의 보컬과 뮤지컬 배우라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문혜원의 ‘여자 하나님’도 인상적이었다. 상당히 육감적인 몸매에 가슴이 깊게 패인 의상(디자이너 황재복의 작품이다)을 걸친, 대단히 파격적인 하나님인데 사랑과 분노의 간극이 워낙 선명해 섬뜩할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이브를 저주하고 분노를 퍼붓는 장면에서의 하나님은 김대종보다 문혜원 쪽이 확실히 더 어울려 보였다.
‘폴링 포 이브’에서 ‘아담’을 맡아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에 선 봉태규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었지만 고독한 연습의 땀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평범한 음색에 별 수 없는 성량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가 ‘들어줄 만’했다는 것은 맹렬한 연습이 조형해 낸 음정과, 발음의 덕이었을 것이다.
‘폴링 포 이브’의 대미는 ‘진정한 천국은 너’라는, 뻔하지만 언제 들어도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메시지로 장식된다. 가사 하나 하나가 마치 광고의 카피처럼 쑥 날아와 박힌다. 멜로디도 좋아 악보를 구할 수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따로 연습해 보고 싶을 정도이다.
취향에 따르기는 하겠지만, 분명 독특하고 재미있는 작품인 ‘폴링 포 이브’. 익숙한 이야기 구조에 개그코드가 넘실대지만, 분명 그 속엔 깊은 울림이 있다. 공연을 보고 하루쯤 뒤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즉시 기뻐할 일이다. 당신은 이브와의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선택받은 관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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