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즈 러너>는 얼핏 보면 높은 성벽과 미로에 갇혀 탈출할 수 없는 이들을 다룬 SF영화 같다. 하지만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기억상실, 미로, 파멸, 집단규범, 시험, 자유 같은 소재를 통해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COLUMNIST 최명기 단지 이름을 제외하고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들이 집단을 이뤄 3년째 살고 있다. 높은 콘크리트 성벽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성벽 밖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보급품이 올라오고, 나머지는 자급자족하며 자신들이 만든 규칙을 지키며 생존하고 있는 소년들. 성벽이 열리는 아침이 되면 수색대가 나가서 성벽 밖 미로를 탐색해 탈출을 위한 지도를 만들어가지만, 그들 중 일부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는 잊고 이곳의 삶을 현재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게 돌아가고 그들은 탈출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를 잃고 싶은 욕망과 잃을까 하는 두려움
인간은 자신을 잊고 싶은 욕망과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의 모순 속에서 산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코드는 ‘기억상실’이다. 인간에게는 이름, 직업, 취향과 같은 자서전적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자서전적 기억 상실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형태의 기억상실은 드물다. 기억상실의 대부분은 사고, 뇌출혈, 뇌경색, 뇌종양 등으로 인해 뇌손상이 발생했을 때 생긴다. 이런 경우, 복잡한 단어, 지식 등이 가장 먼저 손상되고, 자서전적 기억은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다. 나와 관련된 기억은 뇌의 여러 장소에 광범위하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뇌가 심한 손상을 입지 않는 한 끝까지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만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이 기억상실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재의 나를 잊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부모나 배우자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누구인지를 잊게 되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더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괴롭힘 당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들을 남으로 대하게 되고 더는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를 잊게 되면 나의 과거 역시 잊게 된다.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기억을 잃은 이들은 더 강한 사람, 더 선한 사람, 더 완벽한 이로 재탄생되곤 한다. 대중이 기억상실에 관심을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있다. 우리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조직의 부품으로 직장에서 보낸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가족의 일부가 된다. 나는 아주 독립적이고 단단한 경계를 지닌 존재 같지만, 나라는 존재처럼 취약한 것도 없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면 불안하고 괴롭다. 돈 때문에 괴롭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혼하면 괴로운 이유도 누군가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라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처럼 두려운 것이 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잠재의식 속에서 우리는 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에 시달린다. 그런 잠재의식이 기억상실에 대한 관심으로 반영되는 것이다.
미로와 같은 삶, 어떻게 탈출구를 찾을 것인가
우리는 미래의 불안감 속에서 미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두 번째 코드는 ‘미로’다. 미로는 길을 잃게 만든다. 미로 속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미로에는 항상 탈출구가 존재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크레타의 미노스 왕이 만든 미로에 대한 전설이 등장한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화에서 미로는 단골 소재다. 그리고 미로는 점점 현대화되었다. <큐브>에서는 우주공간에서 계속 변화하는 최첨단 초대형 미로가 등장했고, <다크 시티>에서는 밤마다 땅에서 새로운 빌딩이 솟아오르고 기존의 빌딩은 꺼지면서 도시 자체가 미로가 되어버렸다. <인셉션>에서는 우리의 무의식으로 미로를 만들어냈다. 성장이 멈추고, 고용이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안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구분 가지 않게 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시공간 자체가 점점 미로처럼 느껴진다. 길을 잃은 것만 같다. <메이즈 러너>에서 민호(이기홍 분)처럼 설령 미로를 다 파악했다 하더라도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 봉착한다. 어쩌면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는 토마스(딜런 오브라이언 분)처럼 마음의 룰을 파괴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파괴의 욕구와 질서에 대한 합리화
법과 규칙이란 행복한 이에게는 질서이고 불행한 이에게는 약육강식을 합리화하는 도구일 뿐이다
세 번째 코드는 세상이 파괴된 후 재탄생하는 ‘질서’다. 매일 매일 살아가다보니 우리 모두 법과 규칙을 당연하게 여긴다. 최근에는 ‘윤리적 뇌’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우리가 규칙을 지키는 것은 배워서이기도 하지만 일정 부분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단생활에 적절한 뇌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집단을 이뤄 번식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집단생활에 부적절한 뇌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단에서 축출당해 혼자 자연을 상대해야 했다. 생존확률도 떨어지고 그들의 유전자 역시 후세에 전달될 확률이 떨어진다. 수십만 년 전부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진화가 진행되었고, 그러다 보니 타인과 협력할 수 있는 유전자를 지닌 이들만 생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세상의 질서가 모두 파괴된 후에 재편성되는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현 사회의 붕괴 후 생존한 인간들이 어떤 집단을 이루면서 살아가느냐에 대해 관객들이 가지는 심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인생이 안 풀릴수록 사회에 대한 불만은 커지게 된다. 가진 자에게는 현재 이 세상이 천국 같고 없는 이에게는 현재 이 세상이 지옥과 같다. 가진 자는 법과 규칙이 질서를 갖다 준다고 생각하고, 가진 것 없고 소외된 이들에게 법과 규칙은 약육강식을 합리화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건 소설이건 파멸로 결론이 나지 않는 한 결국은 질서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결국 질서란 필요한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게 된다.
행복은 선택의 문제,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가?
행복이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이다
네 번째 코드는 ‘시험’이다. 신화에서도 시험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12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인공이 뭔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목숨을 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과거에는 하나의 큰 시험을 통과하면 주인공에게 보상이 주어지면서 영화가 끝났다면 지금은 더 어려운 시험이 기다리는 식으로 결말이 나고는 한다. 속편 제작을 염두에 둔 포석이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점점 팍팍해지는 현실이 영화 속에 반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삶 VS 거짓된 삶’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참자기(true self), 거짓자기(false self)라는 용어가 있다. 인간은 참자기로서 삶을 살아갈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거짓자기는 주위에 보여주는 모습이다. 참자기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었느냐는 것이다. 주위 동료 의사 중에는 지금도 자신이 의대에 가지 않고 경영학과나 법대에 갔더라면 성공한 CEO나 변호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부모의 강요로 인해서 의대에 온 이들 중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 현재 의사로서의 삶이 나쁘지는 않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기에 자꾸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다. 참자기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느낄수록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며 더 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거짓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럽고 안락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이라면 참된 삶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사회가 낳은 젊은 세대의 피해의식
젊은 세대가 소수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어른 없이 청소년들끼리 서로 협력하면서 생존해야 한다. 이렇게 청소년 집단의 생존투쟁을 다룬 영화나 소설은 많이 있다.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는 어떤 면에서는 이런 소재를 다룬 원조에 해당된다. 그 이후로 계속 소년들끼리의 삶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 또래의 독특한 정서 때문일 것이다. 10대는 자기를 인식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부모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메이즈 러너>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서 청소년들이 자신을 희생한다.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은 저하되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커져가는 젊은 세대의 피해의식이 반영된 부분도 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 한 명이 몇 명의 노인을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통계가 수시로 나온다. 미국은 이혼율도 높고 부모가 자식을 경제적으로 책임져 주는 부분도 우리나라에 비해서 훨씬 덜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청소년을 넘어 어른이 된 자녀들을 부모가 경제적, 심리적으로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그러한 관심이 청소년의 입장에서는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 <메이즈 러너>가 덜 화제가 되는 것 같다. 어떤 점에서는 아직 다행이다. 물론 수입사 측에서는 실망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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