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김수석 편집장의 말, “지금 길에 당신의 어머니가 쓰러져 있습니다”

  • 입력 2015년 2월 11일 10시 21분


김수석 편집장의 말, “지금 길에 당신의 어머니가 쓰러져 있습니다”


지난 1월 17일. 정오경에 서울 마포의 공덕오거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북적이는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길을 꺾어 올라가는 데 앞서 가던 몇 명이 길을 돌아서 가니, 뒤따르던 이들도 길을 돌아서 갔습니다. 그들이 피해간 곳에는 허름한 점퍼 차림에 털모자를 눌러쓴 자그마한 체구의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낮술에 취한 취객이나 노숙자로 오인될 수도 있었지만, 쓰러진 사람을 돌아가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할머니께서 코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어계셨습니다. 뇌졸중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옆에 지구대가 있었기에 뛰어들어가 구조요청을 부탁하고 다른 경찰관과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할머니는 묻는 말에 대답 대신 토사물을 쏟아냈습니다.

할머니는 작은 크로스백을 매셨는데, 소매치기가 우려되셨는지 줄의 중간을 감아서 몸에 꽉 조였고, 옷핀으로 크로스백과 점퍼를 단단히 고정하셨더군요. 이후 할머니는 구급차에 호송되어 응급실로 실려 가 뇌출혈 판정을 받고 시급히 수술실로 옮겨졌습니다.

날이 춥습니다. 겨울은 뇌졸중이 급증하는 시기입니다. 필자의 어머니 역시 4년 전 이맘때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다가 뇌동맥류 출혈로 길에서 쓰러졌습니다. 당시 인근의 분식집 아주머니가 이를 발견했지만, 119에 신고하는 대신 어머니의 정신을 수습시킨 후 어묵 국물을 건네주셨습니다. 따듯한 인정이지만 무지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필자의 어머니는 다행히 출혈량이 많지 않아 시간이 지체되었어도 수술을 통해 장애 없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계시지만, 당시를 회상하면 아직도 가족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누군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거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호소하거나, 길에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면 지체 없이 구급차를 불러야 합니다. 한 번의 주저함이 그 사람의 생사를 가름할 수 있습니다.

약속에 늦어서, 내가 아니라도 뒷사람이 살펴줄 것이기 때문에, 괜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입니다. 무관심도 범죄이고 살인의 한 방법입니다.

“네 행복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선택하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라” 이제는 진부한 표현으로 들리는 이 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야 할 정도의 행동이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 진정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 타인의 질타와 불편이 염려되어야 합니다.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이들에 대해 나무랄 수 있어야 합니다.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위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너무나 가슴 아픈 사고를 많이 당했습니다. 배가 침몰해가는 데도 그대로 숨어 있으라고 지시하는 선장의 안일함에 온 국민이 분노했고, 환풍구가 붕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한탄했지만, 개개인은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나아가는 발길의 관성을 돌리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안전사고는 지난해에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난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의 증거사진을 보면 객차 내에 안개가 자욱한데도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운전자가 방송으로 곧 출발할 테니 안심하라고 했고 사람들은 ‘설마 전철에서 불이 나겠어?’라는 생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린 사람은 모두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009년에 방영한 EBS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에서 유사한 실험을 했습니다. 5명이 앉아서 시험을 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연기가 들어옵니다. 연기자인 4명은 약속대로 자리를 뜨지 않고, 그런 4명의 눈치를 살피던 실험대상자 역시 연기가 자욱한데도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18초 만에 상황을 파악하고 대피합니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해버리는 대중심리를 바꿔야 합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 이 시대에 있다면, 연기가 나는 순간에 박차고 뛰어나갈 수 있는 사람, 더 나아가 사람들을 연기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길에 쓰러진 이가 왕래가 많은 번화가의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거나, 값비싼 코트를 입었거나, 좀 더 젊고 매력적이었다면 상황이 변했을까요. 소매치기가 두려워 크로스백을 꽉 조여 매고 낡고 허름한 점퍼를 입은 작은 노인이 아니었다면요. 만약 그게 사람을 돌아서 피해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면, 이 역시 또 다른 ‘갑’의 횡포입니다.

가스 냄새도 계속 맡다 보면, 후각이 마비되어 더는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스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대중 속에 안전불감증이라는 가스가 가득 차 있습니다. 살짝 불만 댕기면 폭발해버릴 가스가 말이죠.

이제 그 위험을 인지하고 소리치고 도움을 요청하고 날카롭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작년과 같은 상처를 올해도 입을 수 있습니다. 국회의 법이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지켜주지 못합니다. 걸어가고 있는 걸음의 관성을 언제라도 멈출 수 있고, 일상의 무관심을 깨고 대중심리라는 중력을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려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어머니가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라메드 편집장 김수석


라메드 2015. 2월호 소개

프랑스어로 ‘치유’를 뜻하는 <라메드 remède>는 건강, 유기농, 힐링을 주제로 하는 웰니스 매거진입니다.
라메드는 질병의 치료에 앞서 원인과 예방을 먼저 생각합니다. 통합의학적인 관점으로 현대인들 대부분이 겪고 있는 ‘특별한 질병이 없음에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대한 개선안을 제시합니다.
이번 호는 ‘성(性) 건강’ 특집으로 구성했습니다. 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며 올바른 지식을 전합니다. 더불어 서울의 야경 명소를 비롯한 풍부한 문화생활 정보를 제공합니다.
라메드는 여러분의 삶이 더 건강하고 행복해지기를 소망합니다.


<라메드 remèDe> 2015. 2월호

contents
2015. 2 Vol.08


HEALTH


016
issue
생명 위협하는 가짜 비아그라 복용실태

022
issue
은근히 재밌는 성에 관한 궁금증

030
insight
생애주기별 남녀 성기능과 호르몬

032
insight
마음속 은밀한 욕망. 성도착증에 대하여

036
insight
성병에 대한 오만 가지 편견

042
insight
놓치지 말아야 하는 ‘피임상식’

046
focus on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위밴드 이야기

054
insight
사정조절장애, 조루와 지루에 대한 이모저모

058
special_report
성(性)에는 정년이 없다

064
special_column
치매환자의 성(性)문제에 대해


THERAPY

018
issue
부부 권태기 극복법

050
focus on
국민 정신건강 프로젝트

066
campaign
설레임의원 피부멘토프로젝트 ‘메이크업’편

106
cinema therapy
<국제시장>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

118
therapy
안티스트레스 컬러링북


LIVING

024
food
남은 설 음식 100% 활용법

072
food&cook
내 남편을 위한 스테미너 요리

076
travel
서울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090
life
유기견 봉사활동 어렵지 않아요

108
column
어린이집 폭행 사건, 그 이후

110
promotions
2월의 호텔프로모션


CULTURE

014
what's on
Culture Calender

026
interview
고도원 작가의 얼음 땡!

084
interview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정확한 기록과 관찰의 삶

094
culture
민화의 재발견, 한국 미술사에 색채를 입히다

098
culture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영원한 풍경

102
culture
에디터가 추천하는 02월의 문화 소식

114
GAMES
크로스워드, 스도쿠

115
gift
독자선물 및 당첨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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