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품 폐기에 따른 비용이 연간 약 7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에는 먹어도 되는 식품이지만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처리되는 식품이 상당수다. 유통기한이 2~3일 남은 제품을 유통업계에서 미리 반품하는 사례까지 합치면 업계에서는 폐기에 사용되는 비용이 연간 1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식품이 시중에 판매되기 전 실험을 통해 식품 섭취 가능기간을 책정한다. 2007년 1월부터 모든 식품은 ‘식품의 유통기한 설정기준’에 따라 실험과 과학적 검증을 거쳐 유통기한이 정해지고 있다. 이 기준을 통해 제조사는 섭취 가능 기간의 60~70% 선에서 제품 유통기한을 결정한다. 소비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통기한을 넉넉히 잡는 것이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유통기한 제도가 가장 간단한 나라다. 제조일자, 포장일자, 품질유지기한 등 소비자가 눈으로 신선도와 안전성을 확인할 수 있는 표기가 병행되지만, 국내 소비자들은 용어에 대해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경우 제품에 섭취기한(Use by date), 판매기한(Sell by date), 포장일자(Packaging date), 최상 품질기한(Best before date), 최상 섭취기한(Best it used by date) 등 상세한 사항을 표기해 소비자가 관련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해놨다.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제조업체는 편리한 유통기한 형태를 사용한다.
국내의 경우 ‘제조일자’는 제품을 만든 날짜로 영어명 ‘date of manufacture’의 약어인 ‘M’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M151002’는 2015년 10월 2일날 제조됐다는 뜻이다. ‘유통기한’은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법정기한을 뜻한다. 즉 제품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아니라 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이다. ‘소비기한’은 미개봉 상태에서 보관했을 때 먹어도 이상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는 날짜로 2012년 7월 보건복지부가 관련 제도를 도입하면서 제품내 표기를 권장하고 있다. 대체로 소비기한은 유통기한보다 길다.
식품 변질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닌 보관법이다. 올바른 방법으로 저장한 식품은 유통기한이 지났더라도 섭취할 수 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보관한 것은 유통기한이 만료되지 않더라도 상하기 쉽다. 한국소비자원은 유통기한은 식품의 안전 문제와는 별개라고 설명한다. 대부분 식품안전사고는 제조, 유통과정 등 식품을 적절하게 취급하지 못해 발생하는 것이라 유통기한과는 무관하다.
육류는 유통기한이 따로 설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입 후 1~2일 안에 섭취해야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냉동실에 얼려 보관한다면 최대 1년 이상 두고 먹을 수 있다. 고기에서 냄새가 나거나 색이 검게 변했다면 상한 것이므로 버리는 게 좋다.
소비자가 유통기한을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식품 중 하나는 우유다. 시중에 유통되는 우유의 유통기한은 냉장 기준으로 평균 9~14일이다. 개봉하지 않고 냉장보관 하면 제조 후 45일까지 마실 수 있다. 대리점에서 가정으로 배달된 우유를 바로 냉장고에 넣은 경우 유통기한을 넘겨 1~2일 정도 지나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시리얼, 사과 등도 유통기한이 어느 정도 지나도 괜찮다. 시리얼의 유통기한은 가장 바삭바삭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기다. 개봉 이후 비닐팩에 말아 밀봉하면 최대 3개월이 지나도 섭취할 수 있다. 사과도 비닐팩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3주 뒤에 먹어도 큰 문제가 없다. 비닐팩에 구멍을 뚫으면 신선한 상태로 보관이 가능하다.
계란은 물에 넣었을 때 가라앉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먹어도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 요플레는 락트산(lactic acid, lactate, 유산, 젖산, 락틴산) 발효 과정이 이뤄진 제품이 대부분이라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섭취가 가능하다. 유산균이 유단백을 발효시키면서 생기는 유산 등 유기산이 산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우유도 대부분 락트산 발효 과정을 거쳤다. 단 곰팡이가 생기면 색깔이 변질되므로 이 때엔 절대로 먹어선 안된다.
식품 중에는 제조일자는 적히지만 유통기한이 표기되지 않은 것도 있다. 상시 냉동보관되는 아이스크림이 대표적이다. 매장에서 직접 조리해 24시간 내에 모두 판매하는 식품도 별도의 유통기한을 적지 않아도 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이나 제과점 빵이 이에 해당한다.
소금은 높은 염도로 인해 세균 번식이 어렵다는 이유로 유통기한을 표기하지 않는다. 설탕도 소금과 마찬가지로 보관만 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별도의 유통기한 없이 제조일자만 표기된다. 산성이 강한 식초 역시 변질의 우려가 낮아 소비기한이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맛이 휘발되므로 가능하면 빨리 먹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정윤희 한국소비자원 식품미생물팀 선임연구원은 “5도 이하에 보관했을 경우에 우유는 50일, 유음료는 30일, 치즈는 70일까지도 제품에 품질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라며 “가정 내에서 온도관리를 제대로 한 제품은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무조건 버리지 말고 이상징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섭취 가능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엔 모든 제조사에서 정부에서 정한 권장 유통기한을 동일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2002년 7월부터 같은 품목이라도 업체별로 자율적으로 설정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각 기업별 제조시설이나 위생상태에 따라 최종제품의 산가, 오염미생물 수준 등이 달라 유통기한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전식품인증제(HACCP)을 도입한 회사의 제품은 초기균수가 낮고 산가 등 위생지표가 좋다. 즉 살균이 제대로 이뤄지고 신선한 제품을 생산한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유통기한을 길게 잡을 수 있다. HACCP를 도입하지 않거나 설비가 열악한 소규모 기업은 유통기한을 짧게 잡아야 한다.
박기환 중앙대 식품공학과 교수는 “제조·포장·보관 기술에 따라 식품의 품질 및 안전 유지 기간이 달라지므로 이에 따른 다양한 유통기한을 설정해야 한다”며 “획일적인 유통기간 적용에 따른 식품 폐기량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취재 = 현정석 엠디팩트 기자 md@mdfact.com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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